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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토끼 Dec 16. 2023

2019년 10월: 부평초의 집

"네 고향은 O주야. 네가 싫어도 주민번호는 그렇게 되어 있어."


가끔 아버지는 농담 삼아 그렇게 말하시고, 또 자녀들의 고향이 이 지방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듯했습니다. 확실히, 동생들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모두 이 지역에서 다녔고 결혼도 해서 뿌리를 내렸습니다. 누군가 기회를 줄 테니 다른 지역으로 혼자 가라고 한다면 가지 않을, 흙에 땅에 단단히 뿌리내린 보통의 사람들. 저는, 그런 '보통'이 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몸서리치곤 했습니다.


주민번호에 태어난 지역 번호가 새겨져 있다 한들 문화와 추억이 함께 깃들지 않는다면 그저 숫자일 뿐입니다. 태어나고 몇 년 후에 인천으로 가서 초중고 학교를 졸업한 제게는 인천의 친구들과 추억, 문화와 공동체가 있어야 했습니다. 인생의 1/3을 차지하는 중요한 기억이 묻힌 곳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다시 생각해 보지만 부질없는 꿈일 뿐입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일으킨 실수로, 저희 집은 약 20년 동안 인천에서 일군 것들을 모두 팔고 아버지 고향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제가 국내에 없을 때 신속하게 이뤄졌고, 인천공항에 도착한 제게는 "오늘은 인천 백부님 댁에서 자고 내일 버스를 타고 오라"는 메시지가 남겨졌습니다. 그야말로, 집 나갔다 왔더니 집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는 농담의 현실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저는 하나도 우습지 않았고요.


샌드위치 패널로 얼기설기 세운 집 안에는 번개가 쳤고, 욕조에 물을 받으면 쥐가 떠올랐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외곽 차도. 버스도 없어 나갈 때는 항상 부모님께 부탁해야 했고, 자전거도 도둑맞았습니다. 나가는 것도 오는 것도 자유롭지 않은 집을 두고 아버지는, 그때도 여기가 네 고향이라 했고, 저는 고개를 저으며 대학가로 달아났습니다.


대학가라고 사정이 더 나은 것은 아니었지요. 당시 제 대학은 기숙사가 없었고, 지금은 흔한 원룸가도 없었습니다. 고시원과 교회, 하우스메이트를 전전하고, 취직을 한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천에서 살았던 만큼의 시간을 밖에서 헤매는 동안, 제게는 고향이라 부를 만한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느새 저는 물 위를 떠도는 부평초처럼 흘러 다니는 뜨내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뿌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나마 안정되어 있었던 어릴 때의,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던 기억들일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대학생 때 본가를 뛰쳐나간 이후로 10년 만에 들어가는 셈이었습니다. 퇴사 후 재활에 실패하고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퇴직금을 야금야금 까먹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던 거죠. 보다 못한 부모님의 독촉이었고, 다른 방법도 없었던 저는 그렇게 합의를 보았습니다.


다행히 본가는 그때의 샌드위치 패널 집에서 벗어나 아버지 고향 동네 언덕에 어엿한 주택을 세워 살고 있었습니다. 저 집짓기 시작할 때는 직장인이었는데, 이젠 패배자로 돌아왔네, 안녕, 잘 부탁해. 들어가는 차 안에서 그렇게 일기를 썼습니다. 이제 집이라고 할 만한 곳에 왔으니, 여기서 잠깐 쉬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면 다시 나는 서울로 돌아가서 일을 해야지.... 가족들도 저도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어제오늘 해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명, 코피, 중압감, 피로, 종종 혼미, 소리 기피까지. 아프지는 않은데 아픕니다. 기묘합니다. 소리가 안 들리는데 들리고, 활력이 있는데 없어. 우울증에 꽤 오래 단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대체할 수 없습니다. 계속 가슴이 답답한데,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없는 말과 일이 계속 늘어납니다. 그래도 한 주 잘... 아니... 2주? 1주? 잘 버텼는데 오늘 무너지네요. 생각이 안 들어와. 머리가 안 돌아가고 시야가 고정되지 않아. 감각은 쓸데없이 예민해져. 나아가고 있긴 한 걸까. 정말 괜찮은 걸까. 벌써 1년이나 지났는데."


2019년 10월 중에 쓴 일기입니다. 저는 전혀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물에 둥둥 떠서 살던 부평초를 들어 흙에 심은들, 단단한 뿌리가 새로 날 리도 없고 잘 자랄 리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가족들에게 제 상태는, 그저 재취업을 못 하는 상태일 뿐이었지 정신질환이 동반된 은둔형 외톨이 상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는 일이긴 해요. 기껏 큰딸을 데려왔더니 집에서 꼼짝도 안 하고 그렇다고 구직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앉아서 글이나 쓰다가 약 먹고 자기를 2주째. 그러더니 갑자기 약 받아야 한다고 웬 서울에 간대. 무슨 약이냐고 물으니 뭔 공황이랑 무슨 장애?라고 하는데... 자, 제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그 뒤는, 지금 떠올려도 괴로운 말입니다.


"불안장애? 세상에 그런 병이 어디 있어? 말 지어내지 말고 당장 약 끊어! 그 병원도 이상해,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사탕처럼 약 까주는 게 맞아? 너 예전부터 말 지어내기 잘했지, 나 같으면 그것부터 지적했겠어. 서울까지 가서 엉터리 병원 다니지 말고 정 필요하면 여기서 다녀!"


아버지는 늘 취해 있었고, 동생들은 다음 달에 있을 결혼식 때문에 집을 비운 상태. 어머니와 저 둘만 남았던 그날 저녁, 서울로 약을 받으러 병원에 가야 한다는 제 말에 어머니는 화를 내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멈춘 것 같다는 감각은 처음이었어요. 아버지는 술에 취한 상태로 늘 화만 냈고, 동생들은 혈연이 아니었으면 저와 알고 지내지 않았을 거라 말했고, 이 가족에서 제가 기댈 것은 어머니뿐이었는데. 더군다나 당시 어머니는 대학원에 진학해 상담심리를 공부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말을.


그러나 저는 달리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제게 있어 어머니는 가장 똑똑한 교사이자 권위자였고, 실질적인 가장이며 절대로 틀린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게 집이란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요새기도 했고, 그곳에 제가 이해받을 곳은 없었다는 것을, 부당한 위압감 속에서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게는 두 가지 길과 미래만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보나 마나 제대로 된 정신과도 없을 이곳에서 억지로 뿌리를 옮겨 말라죽느냐, 이곳이 집과 둥지임을 부정하고 살 길을 찾느냐.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상태로도 이것은 매우 중대한 선택이었습니다.


"어딜 나가!" 쌀쌀했던 10월 밤공기가 아직도 떠오릅니다. 아귀가 맞지 않는 철문이 닫히는 소리도 선명합니다. 전화기 하나만 들고 집 밖을 나간 저는 병원에 전화를 해 내일 방문할 것이라 말했고, 인천에서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에게 급히 전화를 했습니다. 평소 기면증으로 신경과 약에 지식이 풍부하고 사려도 깊은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친구는 두 시간 남짓의 제 하소연과 불안 증세를 들어주고, 현명한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화가 조금은 가라앉은 어머니께 빌었습니다. '게으르게' 산 것은 잘못했다, 그런데 불안장애라는 건 실제로 있는 병이고 나는 정말 힘들다, 다음에는 이 지역에 있는 병원을 알아볼 테니, 내일 서울 가는 것은 봐 달라... 어쨌든 저는 내일 뿐 아니라 내일모레, 글피도 이 집에 있어야 했고 실질적인 가장은 어머니였으니까요. 당장 부당하더라도 저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머니에게까지 이해받지 못한다면, 제게는 이 집에 있는 시간이 지옥이 될 수밖에 없었기에. 집을 길게 늘이면 지옥이라 하던가요. 이미 정신적으로 홀로 갇혀 있는데, 간수를 늘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차가운 밤이 지나갔습니다. 이 이후로도 몇 번이나.


"20mg에서 10mg으로 약을 줄인 지 이틀째. 어제는 밖에서 불안감에 가슴이 짓눌리는 과호흡이 왔고, 오늘은 불안이 가시지 않습니다. 팔다리도 약간 긴장 상태. 펜을 움직이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고,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려 애쓰는 중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긴, 오늘도 난 근본이 없는 공포와 싸우고 있습니다. 반드시 마라톤의 용맹한 파발꾼처럼 외치리라.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10월 29일의 일기. 가족과 함께 사는 은둔형 외톨이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갈등이 시작된 첫 달의 일기는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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