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교동 법주
우리처럼 작은 가게에는 생각보다 술의 종류가 많은 편은 아니랍니다. 대신에, 단골들에게 각자의 취향에 맞는 술을 미리 준비해드리는 자잘한 재미가 있지요. 가게가 이태원 상권에서 좀 외진 곳에 있어서, 지나가던 손님들이 우연히 들러주시는 곳이 아니라, 어쩌다 한번 오신 분들이 기억하고 찾아오는 곳입니다. 그래서, 한 달에 한두 번 만 오셔도 저희에게는 '단골'이죠.
오늘 소개해 드릴 단골을 위한 한 잔은, ‘경주 교동 법주’입니다. 당연히 메뉴판에는 없습니다. 와인과 싱글몰트 위스키 그리고 크래프트 맥주를 주로 팔고 있는 우리 가게에 숨겨둔 전통주가 있을 거라고는 다들 상상조차 못 하시겠죠. 아는 분은 드시고 모르시는 분은 못 드시는, 최소 2주 전에 주문해야 배달되는 술인데, 일식집에 비유하자면, ‘오마카세’ 같은 서비스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많은 전통들이 사라진 것처럼, 전통주 역시 씨가 말랐다가, 최근에는 전통주 역시 젊은 층에게도 다시 주목을 받는 분위기지요. 몇 해 전에 인기를 끌었던 ‘막걸리’들이 반짝하다 가라앉은(?) 까닭은 그동안 업그레이드된 사람들의 입맛을 따라가지 못한 이유라고 생각해요. 시골 장터의 할아버지들과는 요즘 젊은 세대의 입맛이 완전히 다른데도, ‘약간’ 업그레이드 한 대량 생산 버전으로는 ‘롱런’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굳이 업그레이드하지 않아도, 퀄리티 자체가 넘사벽이라면, 그까짓 세대차이 정도는 가뿐하게 넘어 버릴 텐데요. 바로, 경주 교동 법주처럼요.
경주 교동 법주는 옛날 경주 '최부자댁'의 술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료는 밑술로 밀누룩과 찹쌀을 쓰고, 덧술로 찹쌀밥을 넣고 100여 일간 숙성시켜 만든다고 하네요. 방부처리를 하지 않는 생주라서, 유통기한이 짧고 냉장보관을 해야 하니까, 다른 주류처럼 미리 재고를 쌓아두고 대접하기 힘든 '까다로운 술'입니다.
달콤하고, 부드러워요.
하지만 오히려 이 달콤함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실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드라이한 맛을 좋아하는 진(Gin) 마니아들이나 담담한 맛의 일본식 사케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요. 우리에게 흔한, 맵고 자극적인 음식의 ‘반주’로는 이만한 술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떡볶이와 최고의 궁합이라고 생각해요.
막걸리와 사케의 중간지대에서, 달콤한 아이스와인으로 ‘탈선’한 맛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요. 어쨌거나, 한 병을 다 드시지 못해도 두세 잔쯤 밑술 깔고 가기에는 ‘딱’ 좋을 것 같아요. 막잔으로 드신다 해도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순간 막잔이 아니라 새로운 ‘판’의 첫 잔이 될 것 같네요. 맛있게 드시는 방법으로는 얼음을 한두 개 넣어서, ‘on the rocks 온 더 락스’로 드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위험해요.
자칫하면, 정신을 놓고 나도 모르게 끝없이 마시니까. 어느 순간에는 내가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술을 마시게’ 되니까. 술을 ‘마신다’의 동사(verb)의 주어가 내가 아닌 술이 되는 순간이죠. 게다가 이것은 분명,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서 ‘술이 마셔지다’는 (또 결국... 이렇게 돼버린) 꽐라적 상황.
아니, 애초부터 술을 ‘마시다’라는 말은 동사 같지도 않았어요.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고서야, 술을 무작정 몸에 채워 넣는 게 목적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는 분위기, 그렇게 반갑게 ‘술 한잔하자’는 말이 그려낸 그림은, 그 자체로 형용사가 됩니다.
술을 마시며 나누는 위로, 이야기, 혹은 술의 힘을 빌려 용기 내어본 사랑. 그런 더 중요한 것들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술 한잔 ‘마시기’는 인생의 더 중요한 동사들을 꾸며주는 부사가 되어 줄 것입니다.
어떤 날의 술은, 누군가와의 그 한잔은,
세상의 모든 언어가 되기도 합니다.
달콤한 술을 넘기듯,
내 마음을 멈추지 못하여, 혼자서 바닥까지 갔었어요.
당신이 좋아서. 내가 ‘스스로’ 사랑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누구라도 그러했을 만큼,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던 것일까요. 당신을 사랑하도록 ‘당했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참, 이상하게 들릴 수동태지만, 처음부터 내가 먼저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닌 것 같아서요.
당신과의 짧았던 시간. 내가 아무리 예쁘게 꾸며봐도, 세상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나 혼자 곱게 색칠하는 그림 같았어요. 아무리 그리고 그려도, 그 자리에서 일어날 힘이 없는, 그저 ‘그림’일 뿐이니까요.
예쁘고 소중했지만, 아무 소용없는
알록달록 종이 한 장.
술잔은 다 비워졌는데
이미,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당신은, 여전히 세상의 모든 것처럼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