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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Oct 10. 2023

집 I

어린 기억 속의 집

초록색으로 칠해진 철문을 열고 왼쪽에 있는 ㄱ 자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빨간 벽돌의 아치형 문을 지나 기다랗고 어두운 복도 끝에 비로소 집에 들어갈 수 있는 현관문이 있다. 어쩐지 나는 그 복도를 따라 들어갈 때면 중세 시대의 어느 골목을 걷는 기분이 들곤 했다. 동네 친구들과 왁자지껄 어울리다 가도 그 문을 지날 때면 주변의 공기는 고요해졌고, 복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은 황홀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현관까지 2미터가 채 안되었지만, 나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거리였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 집은 지금껏 살았던 곳 중에 가장 큰 집이었다. 방이 3개였고, 주방과 거실도 제법 널찍했다. 그곳으로 이사하면서 엄마는 처음으로 소파를 집에 들였고, 덕분에 소파에 앉아 거실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에 등을 데우며 책을 읽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절을 계기로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따스한 공기 속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그런 내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 그게 참 평온하고 행복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처음으로 갖게 된 내 방은 현관문을 열면 거실을 가로질러 바로 정면에 마주한 곳에 위치했다. 복도에 쏟아지는 햇살과 같은 볕을 거실과 내 방에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어서, 그 어린 나이에도 그게 참 낭만적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낮 동안에는 늘 창문을 열고, 창밖을 구경하곤 했는데 그래봤자 옆집의 지붕뿐이었지만 운이 좋은 날엔 지붕에 올라온 길 고양이와 눈 맞춤을 할 수도 있었고, 지붕 위에 떨어진 물건을 눈으로 좇으며 누가 쓰던 물건일까, 왜 떨어졌을까, 저렇게 떨어진 물건은 누가 치우나 중요하지도 않은 생각의 꼬리를 이어 잡으며 공상에 빠지곤 했다. 밤에는 빨래 건조대를 펼치고 그 위에 이불을 뒤집어 씌워 손전등 하나 챙겨 들고 들어가 다락방에 갇힌 상상 속 소공녀가 되는 시간을 보내며 내 공간의 하루를 가득 채웠다. 그 집에서 제일 작은 방이었지만, 나에겐 우주 같은 공간이었고 그 방에서 될 수 있는 한 가장 오래 머무르려 늘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런 나를 잘 아는 엄마는 빠진 이를 일부러 두고두고 구경하라며 옆집 지붕 위에 던져 주기도 했다. ‘까치야 까치야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 노래를 부르며 너무 가깝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멀지 않게 내 시야 안에 있을 수 있도록 던져두었다. 설마 까치가 와서 정말 집어 갈까 봐 늘 노심초사하며 창문에 매달려 이가 빠진 자리를 매일 확인하며 안심을 하다 가도 새 이가 안 나면 어쩌나 불안하기도 했던 시간이었지만, 내리는 비를 맞아 휩쓸리는 이를 다시 찾는 일도 거센 바람에 날려 지붕 밖으로 사라진 이를 포기해야 하는 일도 이제는 몽글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늘 단칸방에서만 네 식구가 복작복작 살았던 탓에 한 공간에서 서로 멀찍이 떨어져 지낸다는 게 처음엔 어색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는 각자의 공간 안에서 안온함을 느끼며 금방 적응해 나갔다. 그래서인지 잠깐의 포근함 속에 내가 기억하는 9살 시절은 학교 생활보다는 그 집에서의 기억으로만 가득하다. 엄마는 집터가 좋지 않다며 결국 1년도 채 되지 않아 다른 집을 찾아 다시 이사를 했지만,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그 집을 지나칠 때면 내 기억보다 아치형 문은 더 비좁고, 복도는 음침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낭만이고 평온으로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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