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버전
존경하는 한 인생 선배님께서 제주에 방문할 일이 생기셨다. 일정을 함께하긴 어렵고, 가장 기쁜 마음으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즐거운 식사 장소를 소개하는 것. 제주 맛집 추천은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해 오고 있는 일이지만 여느 '맛집'으로 소개되는 곳이 으레 그렇듯, 맛도 바뀌고 인심도 바뀌고 (확장 개업하며) 위치도 순식간에 바뀌더라. 이에 2019년 9월에만 유효한 버전으로 '단 한 명을 위한 제주 로컬 맛집'을 써 보려고 한다.
1. '제주 향토음식'이라는 커다란 간판을 달고 있는 곳은 되도록 피한다.
2. 원조를 고집하지 않는다. 훨씬 훌륭한 후속 주자들이 청출어람을 만들기도 한다.
3. 포털 블로그 마케팅을 과하게 한 곳은 지양한다.
4. 프랜차이즈라 해서 피하지 않는다. 제주 지역에는 로컬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프랜차이즈가 꽤 있다.
5. 때로는 맛보다 그 식당과 음식을 만들어낸 '스토리'가 더 중요할 수 있음을 기억한다.
6. 어디서나 비슷한 맛을 내는 곳을 찾을 수 있는 메뉴 (ex. 광어회, 근고기, 한치물회 등)는 일단 제외
제주에는 특이하게 '해장국집' 이 굉장히 많다. 최근 제주 해장국이 관광객들 사이에서 유명해지며 급격히 늘어난 면도 있지만, 이전부터도 소위 '제주 3대 해장국집'이니 '5대 해장국집'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오갔던 것과 같이 제주에는 다양한 스타일의 해장국집이 동네별로 하나씩은 자리 잡고 있었다.
추측컨대, 제주 사람들의 음주 습관이 해장국집의 다양성을 증대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저녁 어스름이 몰려올 즈음 마시기 시작해 새벽 네다섯 시는 되어야 막차로 해장국에 소주 한잔 곁들이고 들어가는 애꿎은 한량들의 섬이었던 것이다. 매년 조사하는 전국 시도별 음주율 통계에서 강원과 1, 2위를 늘 다투는 지역이 제주 아닌가.
그래서, 현재는 달라진 곳이 많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업시간이 새벽 3~4시부터 점심장사까지 만 인 해장국집이 꽤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제주 3대 해장국집'에 늘 꼽히며, 서울에 분점까지 낸 은희네 해장국 본점은 아직도 마감시간이 오후 세시다.
오늘 추천해 보는 해장국집은 '대춘 해장국'으로, 제주식으로 만든 해장국의 특징을 잘 보유한 집이다. 맵고 칼칼하게 해장국을 먹는 게 특징. 고추기름이 둥둥 떠 있고 아주 매운 제주 고추도 썰어 넣어 깊게 먹는 게 특징. 또한 아주 달달하고 연하게 절인 깍두기를 함께 물어 먹는 게 참 괜찮다.
표고버섯이 가득 들어있는 재밌는 칼국수집. 간판부터 노포의 포스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현재는 원래 가게 위치에서 조금 이전해서 예전의 느낌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실내 공간은 훨씬 깔끔해졌다) 오랜 기간 동안 제주시청 근처 주민들의 맛집으로 자리 잡은 곳. 메뉴는 칼국수, 비빔밥, 콩국수, 육개장 네 개이며, 각각의 메뉴가 하나하나 포스가 엄청난 식당. 둘이 가면 반드시 저 메뉴 중 세 개를 시켜볼 것. (그래도 15,000원이 안 넘는다.)
개인적인 최고 메뉴는 역시 칼국수로, 두꺼운 면발에 버섯 하나와 무채를 조금 올려서 먹으면 그렇게 조화로울 수가 없다.
점심시간에는 줄이 어마어마하게 섰던 식당인 관계로 방문 시간을 지혜롭게 조정하는 것이 필수.
제주도청 뒤편 위치한 몸국 집. 관광객이 아니라, 제주도청 공무원을 상대로 점심 장사하는 곳. 저녁 장사도 잘 안 하려고 했지만 공무원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저녁과 토요일에는 영업을 하고 있다고. 몸국은 제주의 마을마다 조금씩 국물 내는 방법과 들어가는 재료가 다른데, 우리집밥상은 몸국 특유의 돼지 노린내가 적으면서도, 쫄깃한 점성은 유지해 줘서 맛있게 먹을 만하다.
제주 고기국수야 이미 '올래국수' '삼대국수' 등 일가를 이룬 집들이 많지만, 신흥 강자들이 여기저기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국수만찬 역시 신제주 권역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국숫집이다. 물론, 무엇이 '좋은 평가' 여부를 결정하는가 물어본다면 정량적인 기준을 제시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다만 올래국수에 비해 덜 기다리고, 주차가 상대적으로 용이하고, 국물이 약간 더 진하다는 점. 삼대국수의 얇은 면발에 비해 더 찰지고 씹는 맛이 느껴진다는 점 등이 조금씩 제주시민들의 마음을 신흥 강호 국수만찬에게 가깝게 만드는 듯하다.
서귀포의 두루치기는 원래 노동자·농민의 메뉴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오래 보관 가능한 냉동 돼지고기를 살짝 해동해 양념에 무친 후, 불판에 콩나물, 무채, 마늘, 파채, 신김치와 함께 볶는다. 잘 섞다 보면 신기하게 살짝 국물이 올라오는 타이밍이 나오고, 그때 불을 줄이고 졸여서 쌈과 함께 먹으면 최고의 맛이 나온다. 조리하는 방법도 어렵지 않고, 재료도 모두 반찬들을 사용한 터라, 먹는 시간도 짧고 가격도 쌌었던 것이다.
단, 용이식당이 20년 넘게 변하지 않는 정책이 하나 있어서 주의를 특별히 요한다. 소주를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1인분 7천 원짜리 메뉴를 팔면서 주류를 안 팔면 뭐가 남는가 모르겠지만, 1990년대부터 이렇게 팔아오며 살아남은 집이니 리스펙트 해야만 하겠다)
대신, 소주를 원하는 손님은 자신이 알아서 사 오면 된다.
그야말로 '소주 콜키지 프리'
다만 소주잔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물컵이나 밥사발에 소주를 따라 마셔야 한다는 것.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었을 뿐. 그리고 이제는 그런 불편함을 오래 유지하니 도리어 콘텐츠가 되는 세상이다.
서귀포 올레시장 (구 매일시장) 초입에 들어서면 단번에 '아 저기가 새로나분식' 이구나 알 수 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는 게 단번에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모닥치기'라는 메뉴는 이제는 제주 전역 시장통 분식집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기 때문에 관광객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둘을 꼽으라면, 제주 동문시장 '사랑분식' 의 '사랑식'과 서귀포 올레시장 '새로나분식'의 '모닥치기'가 그것이다. 달게 끓인 떡볶이에 김밥, 군만두, 김말이를 함께 올려서 내놓는 '모듬떡볶이' 개념의 모닥치기는 사투리로 '모두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뜻이다.
자연스럽게 떡볶이 국물이 김밥과 만두에 배어들며 깊은 맛을 보여주는 모닥치기는 이제 전국적으로 퍼져서 일반적인 분식집의 메뉴가 되었지만, 이를 처음 시도한 서귀포 새로나분식에서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 또한 모닥치기를 먹고 나온 후, 서귀포 올레시장의 많은 군것질거리와, 바로 근처 이중섭 거리의 다양한 카페, 펍들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더욱 괜찮은 포인트.
서귀포 구도심에서도 1980년대까지 가장 번화한 거리는 소위 '항공모함 사거리' 주변이었다. '항공모함 나이트'라는 서귀포 유일의 나이트클럽을 필두로, 술집, 볼링장, 노래방 등이 모여 있는 곳이 그것이다. (항공모함 나이트는 한 번도 안 가봤지만 1990년대 초반부터 성업했던 기억이 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과 중국 대표팀의 경기가 서귀포에서 열렸는데, 대회 득점왕을 차지한 브라질 호나우도 선수가 항공모함 나이트에 떴다는 이야기가 기억난다...)
당연히 이 거리에서 빠질 수 없는 게, 2차 술자리가 끝난 후 아쉬워하는 취객들을 위한 국물 식사 겸 막걸리 한잔을 기울일 수 있는 집이었다. 신촌수제비는 오랫동안 새벽까지 영업하면서 다정하게 그들을 위로해 주는 곳이다.
이 집의 수제비는 호박과 시금치 분말을 각각 넣어 빚은 반죽으로 다양한 색깔을 띤다. 조개 베이스의 깊은 국물은 당연히 크게 실패할 일이 없다. 무난한 칼국수의 맛을 느끼는 것보다, 밤 10시 이후 서귀포 구도심의 깊숙한 이야기가 오래된 길에서 꺼내질 때쯤 방문해, 노포의 매력을 느껴보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는 집.
우선 찾기가 힘들다. 일주도로를 달리다 어디서 꺾어 들어가야 될지 몰라 헤매고, 시골길에 진입해서도 꼬불꼬불 깊숙이 들어가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집. 그리고 음식을 주문하고 무척 오래 기다리게 만드는 집. 해병대 나온 걸 굳이 식당 곳곳에 광고하는, 쓸데없는 TMI가 많은 집.
그렇지만 기막히게 불맛 깊은 돌문어볶음을 만들어 주는 집이다. (위에 문제들은 모두 잠깐 용서하기로 한다) 해산물 볶음 메뉴를, 이렇게 불쾌하지 않게 단맛과 매운맛을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식당은 많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 반찬으로 같이 나오는 미역+문어데침도 정식 메뉴라고 생각해도 될 만큼 고급진 맛이었다.
그냥 팥죽이다. 그냥 팥죽인데 주변 경치가 다른 팥죽이다. 이 가게가 위치한 표선면 성읍리는 전통적인 제주식 초가집이 늘어선 민속 마을인데, 옛날팥죽 역시 그 사이에 위치한 초가에 터를 냈다. 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조용한 전통 마을에서 아주 옛날 음식의 대명사인 팥죽을 천천히 한 숟갈, 한 숟갈 뜨다 보면 자연스럽게 존재의 유지를 위해 음식을 먹는다는 것, 식사 시간을 누군가와 함께 공유한다는 것. 이런 것의 본질을 떠올리게 하는 시간을 여기서는 찾을 수 있었다. (물론 팥죽의 맛도 아주아주 괜찮다.)
성산, 표선에서 여행 일정을 마치고 제주공항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위치하여, 제주에서의 마지막 한 끼로 추천하는 곳이다.
이 모든 평가는 다분히 정성적이며, 개인적인 체험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내일이면 위 식당의 주인이 바뀔 수도, 메뉴 구성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니 2019년 10월 이후로는 크게 참고할 필요는 없으실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