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 신발끈과 철학의 종말

by 유다름

내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생이 다 되도록 제 신발끈을 묶지 못한다. 아니, 못 묶는 게 아니고, 묶지 않아도 된다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 모든 건 '보아' 신발끈 덕분이다. 다이얼만 돌리면 내 발에 꼭 맞게 신발끈을 조여주는 그 보아 말이다. 역시, 넘버원 보아.


삐뚤삐뚤, 힘알탱이 하나 없는 그 녀석의 글씨체 또한 비슷한 이치다. 못 쓰는 게 아니고, 안 써도 되니 글씨가 더위 먹은 지렁이마냥 비실비실한 것이다. 키보드와 스마트폰 자판, 태블릿PC 덕분에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의 글씨는 완벽히 평등해졌다.


어디 신발끈 뿐이겠는가. 글씨 뿐이겠는가. 기계는 그야말로 셀 수 없이 많은 손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어디 손 뿐이겠는가. 자동차는 '발'을, 세탁기와 청소기는 '허리'를, AI는 '뇌'를 해방시켰다. "공산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족쇄 뿐"이라고 했던 칼 맑스는 뭘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우리의 족쇄를 푼 건 공산주의 혁명이 아니라 기계 혁명이라는 사실이 보면 볼수록 명백해 보이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이 해방을 맘 놓고 즐겨도 되는 걸까. 아니, 이걸 해방이라고 불러도 되는 일일까. 신발끈 못 묶는 정도야, 글씨 좀 못 쓰는 정도야, 흘러가는 시대에 그대로 흘려보내도 큰 문제는 없을테다. 그런데, 스마트폰에, AI에 우리의 머리를 내어주는 건 맘 놓고 즐겨도 되는 걸까. 해방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손과 발의 노동을 기계에 의탁하는 문제도 되새김질해 볼 일이다. 손과 발은 단순히 노동을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경험을 체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손이 단순한 도구 조작을 넘어 '사유'와 연결된 기관이라고 말한다. 손의 쓰임은 곧 사유 능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 때 우리의 상상력은 확장한다. 발로 어딘가를 걸어갈 때 우리의 생각은 더욱 깊어진다. 손과 발, 육체의 모든 기관들이 제대로 감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좀 더 깊이있게 사고하고, 깊이있게 행동한다. 좀 더 사람다워진다.


21세기 현대 사회에 소크라테스가 사라졌다. 시대를 통찰하는 위대한 철학자가 부재한 지 오래다. 고흐나 피카소처럼 인류에 엄청난 영감을 줬던 '위대한 예술가'도,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드물어진 듯 하다. 이 모든 게 '보아' 탓이 아니라고, '키보드' 탓이 아니라고, 'AI' 탓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기계에 우리의 육체를, 사유를 빼앗긴 탓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스마트폰 탓에 갈수록 언스마트해져가는 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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