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댈곳

by 맑음의 바다



드르륵. 조심스레 철제문을 열었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마저 봄바람처럼 간지러웠다. 기대반, 걱정반. 슬쩍 올려다본 남자친구의 얼굴도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결혼식을 앞둔 우리는 무슨 호기심이었을까. 자주 가던 카페 옆, 작은 골목이 늘 궁금했었다. 좁다란 길 안으로 커플들의 달달한 설렘이 퍼져나가는 사주궁합 가게들. 그중 오른쪽 두 번째 집. 정성스레 코팅된 홍보 용 신문기사가 문 앞에 붙어 있었다.


각자의 생년월일시를 알려주고 침을 꼴깍 삼켰다. 맞잡고 있던 손바닥에 땀이 났다. 사이좋은 부부가 되겠네요. 그 한마디에 안심하는 내 눈빛을 들켰을까. 궁합이 좋지 않다 해도 맞춰 살겠다던 어제의 다짐이 우스워졌다. 부드러운 말투가 내 이모 같았던 그녀는 남자친구가 나무라고 말했다. 그냥 나무가 아니고 아름드리나무, 라고 강조했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뿌리가 단단해 쉽게 넘어지지 않고, 언제나 기대어 쉴 수 있는 나무가 내 옆에 있었다.





커다란 나무 같은 남자친구는 남편이 되었고, 변함없이 따스한 그의 손을 잡고 고모산성을 오른다. 딸아이는 어디선가 집어든 나뭇가지를 요술봉처럼 휘두르며, 일렁이는 햇살 속을 걸어간다. 크고 작은 돌들이 모여 이어진 길은 레드카펫보다 매끄럽다. 파란 하늘 사이로 빼곡히 서 있는 소나무의 향기와 지저귀는 새소리가 바람을 타고 내게 와닿는다.


한 해의 끝이 다가올수록 일에 지쳐, 그저 쉬고만 싶다. 기한은 다가오고, 할 일은 줄지 않고, 집중력은 자꾸만 흐려진다. 방전 직전의 휴대폰이 되어 간신히 버티는 나날들. 눅눅한 피로가 온몸을 짓누른다. 서늘해진 날씨에 마음까지 움츠려 든다. 평일의 고단함이 주말의 활기마저 삼켜버린 무기력한 시간, 일요일 오후 4시. 하루를 걷고 걷다 멈춰 선 곳에서, 푸른 숲 속 산성이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건넨다.



당신의 오늘 하루가
힘들진 않았나요
나의 하루는 그저 그랬어요

괜찮은 척하기가
혹시 힘들었나요
난 그저 그냥 버틸만했어요





둘레 약 1,300미터의 거대한 산성은 5세기에 태어났다. 험준한 산속에 우직하게 서서 세상 무서울 게 있었을까. 단단함은 강력하게 빛났다. 그래서 스스로 강하다고 믿었을까. 무너지지 않는 것이 강함이라고 배웠을까. 삼국시대 신라가 문경 지역에 진출하여 세워진 이래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임진왜란, 항일 의병항쟁에 이어 한국전쟁까지, 얼마나 많은 생명을 지켜냈을까. 창과 화살이 칼이 되고 총이 되는 동안, 산성은 얼마나 많은 죽음을 지켜봤을까.


늦은 오후, 진남문을 들어서는 우리의 발걸음이 숲에 메아리친다. 푸른 산맥은 낮잠을 자는 듯 고요하다. 처절하게 버텨온 시간들이 숙연히 쌓여 있다. 오랫동안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듬직하게 서 있었던 산성은 이제 낡아서 무력한 표정이다. 언제까지나 강한 줄만 알았던 세월을 지나온다. 무심한 세상은, 조금씩 성을 깎아내고 무너뜨리고, 그 속에 숨어 있던 약함을 드러나게 한다. 쓸모를 다한 성벽은 고독하다. 피 비린내도 끔찍한 비명도 사라진 뒤에 남겨진 백지의 침묵은, 이토록 쓸쓸한 것인가.



솔직히 내 생각보다
세상은 독해요

솔직히 난 생각보다
강하진 못해요





8년 전, 퇴사를 결심한 남편은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태로워 보였다. 드라마 <기억> 속, 커리어 절정에서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삶의 중심이 무너져 내린 주인공처럼, 그는 낯선 자신을 마주해야 했다. 견고하게 쌓아 올린 고모산성과 같이 스스로 강하다고 믿어온 삶이었다. 여기저기 구멍 난 틈으로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을 그는 애써 감췄다. 침묵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힘들다고
어리광 부릴 순 없어요

버틸 거야 견딜 거야 괜찮을 거야

하지만 버틴다고
계속 버텨지지는 않네요

그래요 나 기댈 곳이 필요해요
그대여 나의 기댈 곳이 돼줘요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 정상에 도착한 순간, 정지화면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층층이 부드럽게 겹쳐진 능선이 한 폭의 수묵화가 되어 펼쳐져 있다. 얼굴 위로 황금빛 태양이 쏟아지고,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리며 웃는다. 가을바람에 살랑이는 억새 옆에서 내 영혼도 함께 춤을 춘다.


진남교반. 선물상자를 열어보듯 산성 아래를 내려다본다. 산어깨로부터 흘러내린 그늘 속에, 유려한 곡선과 반듯한 직선이 어우러진다. 영강은 유유히 흐르고, 기찻길과 도로가 서로 손을 다정히 잡고 있다. 시간을 두고 하나씩 세워진 다리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어진 것일까. 가운데서 동그랗게 뭉쳐진 온기가 길게 뻗은 도로를 따라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사방이 열려있는데도 어쩐지 감싸 안긴 기분이다. 산성이 내비친 외로움은 내 착각이었는지 모른다. 묵직한 돌로 자신을 단단히 쌓고, 무너졌다가, 다시 견고하게 다져온 긴 시간 동안, 줄곧 푸른 나무와 빼곡한 산이 곁에 있었으니까. 새가 찾아오고 바람이 속삭이고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흐르는 강물 위로 다리가 이어지고, 그 길 따라 수많은 인연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오래도록 산성은 홀로 서 있지 않았다는 걸, 이제 안다. 온 세상이 조용히, 부드럽게, 그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는 걸.



항상 난 세상이
날 알아주길 바래

실은 나 세상이
날 안아주길 바래





잠 못 드는 어느 밤, 나는 거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요즘은 그런 날이 많았다. 낮동안 해결하지 못한 업무 스트레스가 내 안에 노폐물처럼 쌓여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남편은 가만히 노래 한 곡을 틀어주었다. 창백한 밤공기 사이로 싸이의 <기댈곳>이 흘렀다.


그것은 남편이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와 같았다. 잠시나마 나의 전부인 줄 알았던 하찮은 스트레스는 증발하고, 그가 가진 힘듦의 무게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가 퇴사를 결심했던 그때, 매일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을 때, 나는 그에게 기댈 곳이 되어 주었을까. 강해야 한다고 배워온 그는 아무도 모르게 쓴 맛을 삼키며 이 노래에 힘겹게 기대었을까. 덤덤하게 내뱉는 싸이의 목소리가 인정사정없이 내 마음을 쿡쿡쿡 쑤셔댔다.



괜찮은 척하지만
사는 게 맘 같지는 않네요

저마다의 웃음 뒤엔 아픔이 있어
하지만 아프다고
소리 내고 싶지는 않아요



괜찮은 척 버텨온 시간들이 안쓰러웠다. 조금은 무너진 모습을 보여도, 그래서 서로에게 기대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내 곁을 지켜주는 남편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저려왔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에게 기대어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넉넉한 나무그늘은 언제나처럼 편안했고,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피아노 건반 같은 돌계단을 하나 둘 밟고 내려간다. 산성은 그래서 힘들다고, 기댈 곳이 필요하다고 말했을까. 괜스레 뒤돌아보며 발걸음을 늦춘다. 하늘에 포근한 노을이 번져 나간다. 잎이 무성한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려 쏴아, 파도 소리를 낸다. 해가 넘어간 뒤, 달이 뜨고 별빛이 쏟아질 이곳을 마음에 담는다.


성벽은, 우주의 다정한 손길에 기대어 고요히 오늘을 견뎌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한 자리를 지켜온 이유를 이제 알 것도 같다. 올라갈 때와 달리, 가슴 한 구석이 아랫목처럼 뜨끈해진다.





11년 전, 우리의 궁합을 봐준 그녀는 말했다. 남편은 나무, 나는 흙이라고. 그의 거대한 나무는 나의 흙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흙은 나무를

조용히 안고 있다.


지금까지.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기댈곳>

- 싸이(P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