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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by 맑음의 바다



가위 바위 보. 차를 타면 노래를 듣기 위해 제일 먼저 하는 일이다. 이번엔 딸의 한호성이 우렁차다. 그녀는 고민 끝에 자신의 플레이리스트 하나를 선택한다. 멜론에 저장된 103개의 음악서랍 중에 78개가 그녀의 것이다. 지난번 듣다가 멈춘 곡이 새롭게 흐른다.



다른 문을 열어
따라갈 필요는 없어

넌 너의 길로
난 나의 길로



저녁 7시. 차가운 가을밤 짙은 어둠 너머로 밝게 떠오른 달 하나. 광대한 우주 속 작은 별 같은 나는 그 길 위에 그저 눈을 깜빡인다. 이황이 머문 도산사원은 언제나 그 자리에, 변함없이 반짝이는 달이고, 나는 그 그림자조차 눈이 부셔서 어쩔 줄을 모른다.





자그마한 서당이 사액을 받아 서원이 되고 수백 년이 흘러간다. 안동댐 건설로 서원 앞 지대를 올려 새로 길을 내고, 또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간다. 뱀 똬리처럼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주차장에 도착하고 나서도, 서원 입구로 오기까지, 수천 걸음의 인내가 필요하다. 이황은 은둔을 원했지만, 미래 사람들은 마치 마법에 이끌리듯 꼭꼭 숨어 있는 그의 공간을 찾아내고 또 찾아낸다.





하루하루마다
색이 달라진 느낌

밝게 빛이 나는
길을 찾아



밤의 옷을 갈아입은 서원은 다른 곳이 되어 있다. 조명이 드리운 기와는 낯익은 풍경에서 낯선 감정을 이끌어 낸다. 부슬부슬 빗방울이 떨어진다. 좁은 통행로 위에 적지 않은 관광객이 뒤섞인다. 비와 밤의 냄새가 뒤섞인다. 그렇게 어둠 속에 빛나는 길을 따라 걸어간다.


단칸방에 자그만 부엌과 마루가 있는 도산서당은 처음처럼 새롭다. 화려함도, 위엄도 없다. 대신 방에 달린 작은 창 밖으로 산과 물, 그리고 바람이 있다. 아담한 마당에 북적이는 사람들 틈으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다. 서당을 직접 짓고 60세 즈음 이황이 강학을 시작한 날, 그 첫 마음이 비가 되어 내린다. 그리도 진실된 마음은 칠흑 같은 밤과 잘 어울린다.





퇴계 이황은 45세 무렵 첫 사직서를 냈다.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와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고 싶어 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그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50대 후반에 끝내 물러났다. 고향 도산에서 고요히 자신이 믿는 길을 걷는 동안에도 임금과 조정의 부름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병든 몸을 벗어나 홀연히 먼 길을 떠난 69세까지 그가 제출한 사직서는 70여 개였다. 그 역시 오래도록,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I'm on my way
넌 그냥 믿으면 돼

I'm on my way
보이는 그대로야





도산서원 마루에 앉아 촉촉한 밤을 바라본다. 지붕아래 한가득 걸려있는 편액들이 왠지 따스하다. 그 정갈한 글자들이 담은 마음은 먹구름 뒤에 가려진 달빛인가, 아니면 별빛인가. 세상의 이치를 깨쳐 나가는 제자의 즐거움이 곳곳에 배어 있다. 전교당에서 스승을 닮고 싶었던 젊은 미래들의 푸른 희망은 어디까지 날아갔을까. 그날의 푸름이 아직도 하늘 어딘가를 물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는 누군가의 dreams come true
제일 좋은 어느 날의 deja vu
머물고픈 어딘가의 낯선 view
I'll be far away



서원 뒤로 들어가면 퇴계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나온다. 도산서원에서 제일 높고 깊은 곳. 전혀 다른 세상인 듯 고요하다. 문이 세 개 보인다. 가운데 문은 혼령이 지나는 길이라 계단이 없다. 이황의 영혼은 그 사이로 즐겁게 드나들었을까. 그리워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들이 모여 공기가 되고 바람이 되어 흩날린다.





퇴계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차례로 떠나보냈다. 어릴 적 아버지부터 형제들을, 성인이 되어서는 첫 부인, 둘째 부인, 둘째 아들, 증손자까지. 살아내는 일은 언제나 이별을 끌어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가두지 못했던 상실은, 오히려 더 단단히 내면을 지켜준 게 아닐까. 그 모든 비극 앞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과거에 여러 번 실패하고 30대 중반에야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성균관 대사성 등 중요한 관직을 맡았지만, 그럴수록 더 깊어지는 질문이 있었다. 과연 그것이 세상을 바르게 이끄는 길인지에 대해. 을사사화 때 형인 이해가 권력 투쟁에 휘말려 죽었고, 이로 인해 자신도 한때 파직당하기도 했다. 정치의 파고 속에서 그는 점점 더 학문의 자리, 스스로의 길을 그리워했다.


벼슬과 학문 사이에서 수차례 갈등했고,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결국 선택한 것은 단 하나였다. 자신의 믿음을 가르치고,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하여 도산에서 10년 남짓한 시간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크고 찬란한 무대가 되어 주었을까.



Life is
아름다운 galaxy

Be a writer
장르로는 fantasy

내일 내게 열리는 건
big, big stage

So that is who I am





딸아이는 수학 문제를 풀 때 케이팝을 듣는다. 책상에는 IVE(아이브) 포토카드가 담긴 앨범이 책꽂이에 빼곡하다. 하얀 벨보아 천 위에 아기자기한 캐릭터들이 서 있는 배경으로 아이는 포토카드 포장 영상을 찍는다. 시력 보호를 위해 설치해 준 스탠드는 처음 의도와 다르게 촬영 조명으로 활약 중이다.


내가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를 줄구장창 들을 때, 나의 엄마는 내가 커서 뭐가 될지 걱정했을까. 동네 문구점을 들락거리며 ‘노이즈’ 책받침을 사 올 때, 나의 아빠는 쓸데없는 걸 산다고 혀를 찼을까. 내가 책상에서 공부할 때 정신 산만하게 노래 듣는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까. 아니, 아니, 전혀 아니다.


노래는 언덕과 같았다. 넘어지면 기대어 쉬었다가 일어섰다. 그렇게 걸어온 줄 알았다. 하지만 넘어진 나를 수백 번 일으킨 건, 노래 속에 파묻혀 있는 나를 향한 부모님의 믿음이었다. 그 절대적인 빛이 어둠을 뚫고 나를 이끌어 주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도록, 비바람 속에서도 내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힘들 때 그 언덕에서 충분히 쉬었다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이가 걸어가는 길에 나도 빛이 되어 줄 수 있을까. 굽이굽이 소용돌이치는 삶에 지치지 않도록, 좋아하는 음악 속에서 그 환한 웃음을 지켜줄 수 있을까. 이황이 도산에서 인생의 답을 스스로 만들어 갔듯이, 아이가 찾아가는 여정을 내 부모님처럼 그렇게 믿어줄 수 있을까. 그녀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언젠가 훨훨 날아갈 때까지, 그렇게 지켜봐 줄 수 있을까.





서원을 등지고 다시 내려간다. 내 앞에 총총 걸어가는 그녀에게 이곳은 어떤 의미로 남을까. 우리가 차 안에서 함께 들은 IVE의 <I AM> 노래가 마음속에 재생을 반복한다. 이황의 깊은 뜻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도산서원에서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뜨겁게 차오른다.



어느 깊은 밤
길을 잃어도

차라리 날아올라
그럼 네가 지나가는 대로 길이거든

One, two, three,
fly up!






도산서원의 밤은 어둡지만, 그 어둠 속 길은 분명하다. 자신만의 길로 가는 사람만이 보이는 빛이 있다면, 그래서 이황은 그 길을 평생 걸었던 걸까. 끝까지 자신이 믿는 것을 놓지 않았기에 비바람 휘몰아치는 세상에서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이곳이 존재한다.


사각사각, 발소리 뒤로

빛은 조용히 길을 남긴다.

말없이, 믿는다는 듯이.










<I AM>

- 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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