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좋았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가슴이 답답해질 때면, 그래서 호흡이 가빠질 때면 불현듯 생각나는 곳이었다. 이리저리 뒹굴며 부딪힌 내 영혼이 온전히 쉴 수 있는 곳이었다. 때가 되면 그곳이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날들 중 하루가 오늘이었다.
울창한 소나무숲을 거닐었다. 시간의 속도는 힘을 잃고 느릿해졌다. 느지막한 오후의 눈부신 햇살은 황금빛 띠를 만들어 오래된 숲을 끌어안고 있었다. 긴 세월 비바람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온 숲에는 듬직한 냄새가 났다. 가느다란 몸통으로 빼곡히 시간을 버텨온 키 큰 나무들은 그렇게 당당했다.
자연의 일부인 듯 소박한 정자가 거대한 암석 위에 서있었다. 퇴계 이황의 종손 우암 이열도의 부친 이굉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정자는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꿈을 꿨다하여 선몽대(仙夢臺)라고 이름 지어졌다. 460여 년 된 정자에는 앉아볼 수가 없었지만, 그 앞에 펼쳐진 자연은 보이는 대로 내 마음속에 담아둘 수 있었다. 어딘가 갇혀있었던 것만 같은 내 영혼은 이곳에서 자유로이 날아다녔다.
퇴계 이황이 선몽대 현판을 친필로 써주었고,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등 당대 지역 유학자들이 이곳 예천 선몽대 정자에 앉아 자연을 즐기며 시를 읊고 모임을 가졌다. 수백 년이 지나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은 닳고 낡았지만, 나라를 위하는 뜨거운 열정이 녹아들어 단단한 빛을 품고 있었다. 그들의 이름과 글이 후세에 빛나고 있듯이.
정자 앞에서 긴 시간을 보내온 자연은 다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강해 보이려 하지만 한없이 약한 인간의 희로애락이 가득한 인생 하나하나를. 예전보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지만 마음은 더 가난해 보이는 현대인의 지친 영혼 하나하나를. 인위적인 무생물로 가득 찬 물질세계를 벗어나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자연으로 언제든지 오고 싶어 하는 나를.
야트막한 산이 만들어내는 능선이 포근했다. 유유히 흘러가는 내성천과 드넓은 백사장은 그 끝이 어딘지 모른 채 반짝거렸다. 100년이 훌쩍 넘은 소나무들은 흘러가는 시간을 보듯 내성천이 흐르는 모습을 묵묵히 보고 있었다. 굽어진 몸통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온 가지의 푸른 솔잎들은 하늘을 다 가릴 기세로 무성했고 은은한 향기가 났다.
가져간 의자를 펴고 앉았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랐다. 1분을 10분처럼 숨을 쉬었다. 불을 붙인 향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뿜어 나오는 걸 지켜보듯이, 아주 천천히 느꼈다.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나를 둘러싼 공기의 냄새와 공간의 색깔과 자연의 소리를.
2주 전, 대학병원 교수를 만났다. 3시간의 기다림이 힘겹게 짜낸 3분이었다. 사이즈가 커서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티셔츠에 찌든 얼룩 제거를 말한다고 믿고 싶었지만, 우리 앞에 엑스레이 사진이 있었다. 행여나 내가 순진한 희망을 가지지 못하도록, 수술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 주었다.
세제와 물과 함께 춤을 추다 세탁기에서 나오면 끝이 나는 얼룩진 티셔츠와는 다르게 나는, 마취와 절개와 스티치와 그 이후 긴 시간이 필요함을 알았다. 나의 것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엑스레이 사진이 적나라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끝이 없이 밀려드는 다음을 처리하기 바쁜 사람들과, 침울한 표정으로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은행 창구 같은 곳에서 나는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병원 밖 햇살이 유난히 눈부셔서 눈물이 흘렀다.
하늘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노을을 보면서 왜 지금인가를 생각했다. 무엇을 말하기 위해 지금 나에게 왔는가를 생각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알아차려야 했다. 그동안 소홀히 여겼던 것들을 알아봐 줘야 했다. 크게 아픈 곳 없이 잘 살아와서 괜찮은 줄만 알았던 내 몸과 마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이제는 잘 들어줘야 했다.
새파랬던 하늘에 노랗고 붉은빛이 퍼져나갔다. 한시도 같은 모습이 없었다. 서서히 넘어가는 태양은 부드러운 빛깔로 하늘을 포근히 덮어주고 있었다. 소리 하나 없이, 웅장하면서도 절제된 피아노 연주가 들리는 듯했다. 황홀한 노을과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르고 있음을 느꼈다. 몸과 마음이 가장 아픈 순간, 인생이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사실을 가장 뜨겁게 깨달았다.
남편이 당근싹을 키우기 시작했다. 요즘 관상용으로 많이들 키운다고 했다. 지난달, 내가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때였다. 그는 요리에 쓰고 남은 당근 꽁지를 물에 담가 놓았다. 2센티도 안 되는, 아주 작고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에서 그다음 날 새싹이 났다.
토네이도처럼 갑자기 불어닥친 일로 인해 나는 흑백 세계에 잠겨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마냥 서성거렸다. 평생 완전하다고 느끼지 못한 내 인생은 더욱 작아져 여전히 1이 될 수 없는 분수였다.
그런 내 앞에 당근싹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아래 주황색 영양분을 끌어당겨 초록색 생명력을 키워내고 있었다. 그것은 위아래가 충만하여 자연수 1을 만들어 냈다. 한 뼘도 안 되는 새싹은 겨울에 반짝거리는 그 어떤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보다 아름다웠다. 내가 사 먹은 죽에 딸려온 반찬이 담겼었던 작은 플라스틱 그릇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어느새 가을바람이 차가워져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임을 알았다. 화려한 노을 끝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고 일어섰다. 의자를 정리하다 본 오른쪽 하늘은 여전히 해맑은 얼굴이었다. 지금처럼, 어쩌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아왔을까. 동전의 양면처럼 어둠과 밝음은 늘 가까이 있었다. 삶과 죽음이 항상 함께 있듯이.
즐거움만 담아내려고 했던, 부족한 분수 같은 내 삶은 아픔의 분수도 더해야 완전해지는 것이었다.
슬픔 속에 기쁨이 피어나듯,
딱 오늘 같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