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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by 맑음의 바다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간다. 가을인가 싶게 시원했던 날들이 지나가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폭염이다. 모래시계를 뒤집듯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 걸까. 땡볕이 차창을 데우고 아스팔트 도로는 이글거린다. 선글라스를 뚫고 들어온 태양에 눈을 질끈 감는다.


차 안 스피커에서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 노래들이 흘러나온다. 이 영화를 딸아이와 세 번은 봤던가. 아이는 재밌다고 혼자서 네 번을 더 봤던가. <Golden>, <Soda Pop>부터 <Free>까지 주제곡을 사백오십일곱번쯤은 들은 것 같다. 집에서, 차에서, 우리만 있는 곳 어디서든.


나는 눈을 감았을 뿐인데 어느새 잠이 들었나 보다. 표충사 주차장에서 남편이 나를 깨운다. 잘 주무셨냐고, 장난스럽게 웃는다. 나는 하품을 하며 말한다. 잠이 아니라 차멀미라고요. 그나저나, 꿈속에서 영화 주인공 루미를 본 듯하다.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데몬 패턴에 괴로워하다가, 어느 순간 홀가분하게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비몽사몽한 와중에, 차 안에는 <Free>가 잔잔히 흐르고 있다.



우린
자유로워질 거야.

과거는 그대로 두자,
무게가 사라질 때까지.





차에서 내리자마자 뜨겁다. 남편은 검은색 벙거지 모자 아래에서 미간 주름을 다섯 줄 만든다. 나는 딸의 손을 잡고 걷다가, 어디선가 느껴지는 신비한 기운에 두리번거린다. 우리를 둘러싼 재약산은, 높고 낮은 산봉우리를 따라서 짙푸른 숨결을 내쉬고 있다. 이러니 여름을 마냥 미워할 수가 없다. 하늘은 온통 새파랗고, 하얀 구름은 초록 능선 위에서 느릿느릿 쉬어간다. 찜질방 같은 따땃한 공기도 괜찮다. 괜찮고 말고.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사원이었으나, 산세가 험해 지금의 자리(영정사 터)로 옮긴다. 오늘날 이곳은 사명대사와 스승 서산대사, 그리고 이들과 뜻을 함께한 기허당대사까지 함께 기리며, 불교의 도와 유교의 충이 나란히 자리한 특별한 공간이 된다.


일주문을 통과해 고즈넉한 숲길을 걷다 표충서원 입구가 나타난다. 시원스레 펼쳐진 서원 마당이 매일 세수한 듯 말끔하다. 투박한 흙바닥을 밟는 것뿐인데 마음이 개운해진다. 아찔하게 높은 계단 끝에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불교의 세계가 열린다.


상서로운 빛과 그림자가 드리워진 산자락이 사찰을 아늑하게 감싼다. 무대 주인공처럼 경내 한가운데 서 있는 삼층석탑과 석등은 볼수록 오묘하다. 표충서원이 여기 영정사 터로 옮겨 표충사가 되기 전에, 영정사가 폐사되기 전에, 죽림사가 영정사로 이름 바꾸기 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죽림사 시절부터 있었던 셈이니까. 통일신라시대부터 기나 긴 세월의 무게는, 묵직한 석탑의 지붕돌 위에 고요히 내려앉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는 깊은 고뇌에 빠진다. 모든 생명의 존엄을 강조하는 불살생의 수행자에게 칼을 들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무겁게 짓누른다.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과 불교의 가르침 사이에서,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업보와 부처님의 뜻 사이에서, 갈등의 칼날이 날카롭다.



피하려 하니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말은 목구멍에 맺혀
끝내 나오지 못하도다.





왕의 피란과 조선 조정의 붕괴, 유린당하는 백성. 당시 73세였던 스승 서산대사의 횃불 같은 격문이 전국 사찰을 뒤덮고, 백성의 절규가 천지를 뒤흔든다. 그는 마침내 자신 안에 몰아치는 번뇌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비극적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칼을 들어야 함을, 생명을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 필요함을, 그것이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임을 깨닫는다.

조선의 승병들이여,
깃발을 치켜들고 떨쳐 일어날지어다!
…….
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함이야말로,
또한 중생을 대신하여 고통받음이
곧 보살이 행할 길이며 나아갈 도리로다.

- 서산대사의 격문 중 일부


그는 승병을 이끌어 주요 전투에서 탁월한 전략을 발휘하고, 일본 침략군의 장수 가토 기요마사와의 회담을 주도한다. 전후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협상을 통해 약 3천 명의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외교 활동 하나하나는, 살생이 아닌 방법으로 더 많은 생명을 구하고자 한 불굴의 열망이 아니었을까.


전쟁 중에도, 그 이후에도 가슴 깊이 박힌 괴로움을 끊임없이 마주 하면서, 그렇게 나아간다. 단단한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온 그는, 칼을 휘두른 슬픔을 딛고서 끝끝내 자유로운 내면의 평온으로 날아올랐을까.



피하려 하였으나,
맞서 싸우는 것이 옳으니라.

마주하지 아니하면,
그릇됨을 어찌 바로잡으리오.

이로써 자유를 얻으리라.





영화 속 데몬 사냥꾼인 루미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데몬 패턴 때문에 끝없는 상처와 고뇌에 허덕인다. 사명대사에게 스승과 백성이 있었듯, 루미에게도 어느 날 진우가 나타난다. 자신의 고통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진우를 만나고, 비로소 직면할 용기를 낸다. 상처를 바라보고 내면의 어둠 속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방법. 진정한 치유는 거부하던 것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도망치던 것과
맞서 싸워본다면 어떨까?

마주하지 않으면
나아질 수 없으니까.

우린 그렇게
자유로워질 수 있어.





대광전의 층층이 화려한 단청 아래로 스님의 법경이 울려 퍼진다. 몇몇 사람들은 맞은편 우화루에 앉아 귀를 기울인다. 누각 뒤에는 계곡이 시원하게 흐르고, 물놀이하는 아이들 웃음소리도 같이 흐른다. 뙤약볕을 막아주는 누각의 든든한 기와지붕이 있으니, 기둥 사이로 한 줄기 바람이 들어오니, 내 마음도 홀가분하게 저 파란 하늘을 날아오를 것만 같다.


사명대사의 자유로운 영혼도 여기 어느 처마 끝에서 바람과 함께 쉬고 있을까.








딸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멈춰 선 곳에 다가간다. 연분홍빛 상사화가 아름드리 피어 있다. 잎이 지고 난 뒤에 꽃이 피기 때문에, 잎과 꽃은 서로 만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꽃 이름 상사(相思)는 서로 그리워하지만 만나지 못하는 사랑을 상징한다. 사명대사의 가슴 찢어지던 아픔이, 잎과 꽃처럼 계율과 칼의 엇갈림이었던가. 가느다란 줄기 끝에 여러 송이 꽃이 모여 피어나서, 꽃잎은 정면이 아닌 옆을 바라본다. 쿵쾅거리는 내 심장은 더위 때문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번뇌 끝에 피어난
눈물 맺힌 자유가

햇살 아래 빛난다.
















<Free>

- EJAE, KPop Demon Hunters Cast,

Andrew Choi, Rumi, Ji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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