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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Dec 05. 2019

웃음을 파는 직업

웃음을 팔아본 적 있나요?






이 이야기는 대충 보면 '프로사직러의 좌충우돌 이직 이야기' 같지만 음흉한 속내가 따로 있습니다.









2014년, 대기업 면접을 참 많이 봤었다. 그러니까 내가 대학교를 졸업한 건 2010년인데, 2014년에 돌연 취업 타깃을 변경하게 된 것이다.






대기업에 취업한다는 건 대학교를 다니며 대기업에 합격한 선배가 찾아와 강의를 할 때도, 영양사 면허를 따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을 때도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다. 지원했다는 사람을 보면  "대기업이라니? 그거 잘난 사람들만 지원하는 거잖아. 오 저 사람 잘났나 봐."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대기업은 얼굴도 예쁘고 성적도 좋고 그도 아니라면 다른 뛰어난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열려있는 곳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난 그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2014년 나는 소기업에서 일을 그만두고 대기업의 영양사를 보조하는 사람을 뽑는 채용공고를 보게 됐다.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보조'영양사에 잘 지원하지 않지만 대기업에서 보조라도 한다면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나름 대기업에 원서를 넣는 건데 대충 넣을 순 없었다. 여태 썼던 이력서를 과감히 다 지우고 대기업 합격 수기를 열심히 찾아봤다. 합격 자기소개서는 저마다 다른 매력을 어필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나라면 업신여겼을 자신의 작은 장점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얼마나 그 장점을 잘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공을 들였다. 단점은? 있는 그대로 말하지만 그다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인정하되 짧게 언급만 한다. (더 깊이 들어가자면, 단점이긴 한데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라고 할 만한 것을 쓴다.) 여하튼 내 눈에 보이는 합격 자소서의 장점들을 내 이야기에 적용시켰다. 하다 보니 점점 기술이 늘었다. 그리고 쓰면 쓸수록 더 나 자신을 샅샅이 훑는 게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보조영양사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그런데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 하며 기대했지만 일자리 제안은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대기업에 이력서를 많이 넣어보셨냐"라고 물었다. 처음이라고 말하자, 이런 계약직 말고도 대기업에서 경력직을 많이 채용하니 다른데 지원을 해보라는 거였다.



아니, 생면부지의 남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런 크나큰 희망을 주시다니요. 선생님. 보고 계세요? 저를 기억하시나요? 만나면 참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나는 그의 한 마디에 전략을 바꿨다. 아니 생각을 바꿨다. '나라고 대기업에 지원 못할게 뭐야? 떨어지면 말고, 일단 넣어보자.'라고. 그러고 나선 국내에 있는 대기업 중 급식운영을 하고 있는 모든 기업에 입사지원을 했다. 어떤 곳은 몇천 자를 쓰라고 하는데 이렇게까지 지원자를 괴롭힐 이유가 있을까 욕을 하면서 꾸역꾸역 칠천 자를 채웠다. 질릴 만큼 내 이야기를 했다. 서류에 합격하지 못한 곳은 딱 두 군데다. 서류만 합격하면 면접은 자신 있었다. 그리고 합격을 한 곳을 모두 찾아가서 면접을 본 뒤 연봉을 비교해서 일할 곳을 고를 작정이었다.


나의 선택은 그 당시 받던 연봉보다 몇백만 원을 더 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담당자, (나의 상사가 될 사람) 자꾸만 내 근무지를 변경하는 거다. 일을 시작도 전에 말이다. 갑질도 이런 갑질이 없었다. 하지만 팀장은 오픈하는 업장을 여러 개 두고 영양사를 체스 두듯이 여기, 저기 배치해보는 상황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지냈던 곳을 떠나야 하는 부담감을 겨우 이겨내고 일을 마음먹었는데 그 마저도 또 언제 업무 지역이 바뀔지 모르는 일이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모든 대기업이 타 지역에 직원들을 보내는 것에 있어서 거리낌이 없다. 직원들 또한 속으로야 무슨 욕을 하건 회사에 그 때문에 의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없었다. 대기업에서 일을 하려면 이는 숙명이었다. 더군다나 매출액에 따라 수시로 개업과 폐업을 반복하는 급식업체는 더더욱 심했다. 나는 입사를 거부했다. 왜냐면 이 회사 말고도 다른 대기업에 합격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업무 시작도 전에 이렇게 지역을 많이 바꾼 곳은 이곳이 유일무이했다.


그다음 면접을 보러 간 곳에서는 "주량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을 하는 이유를 물어보니 고객사와 한 번쯤은 같이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에 참석해야 하니, 술을 어느 정도 마시는지 궁금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면접에서 물어볼 만큼 영양사의 주량은 참 중요한 덕목이었던 것이다. 이곳은 나중에 욕을 하고 나오지 않은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이번에는 큰 욕심 없이 적당한 곳을 골라 입사를 했다. 영양사에게 인수인계도 받았다. 입사 후 고객사에 인사를 드리러 가는데 나의 상사가, 나에게 입술을 좀 더 진하게 그리라고 했다. "응? 더 연하게 가 아니고 진하게?" 내 입술에 핏기가 없어 보였나? 생각하며 그 일은 잊어버렸다. 며칠 후 나에게 인수인계를 해준 영양사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 준비를 하더니 화장을 고쳤다. 옷도 평소와 다르게 치마를 입었다. 이유인즉슨 이제 그만두니 여태껏 감사했다는 의미로 고객사 직원들과 밥을 먹으러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영양사의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평소에 정말 독하다 싶을 만큼 강한 멘털을 가진 여성이었는데 그 날은 웬일로 평소의 독기가 보이지 않았다. 새신랑의 얼굴도 모른 채 첫날밤에 끌려가는 신부의 표정이 저랬을까. 이제야 생각해볼 뿐이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대기업은 영양사뿐만 아니라 조리장을 (가능하다면) 남자로 뽑아 둘이 협업을 하게끔 한다. 게다가 이 기업의 조리장은 흔히 생각하는 조리원과 는 다소 포지션이 다르다. 어떤 곳은 영양사의 업무를 함께하는 조리장도 있다. 영양사와 같은 책임자 역할이다. 하지만 친목도모 장소에 조리장은 가지 않는다. 남자인 조리장은 가면 안된다. 고객사 직원의 임원은 대부분 남성인데 조리장을 데려가서 무슨 '흥'을 깨려고?


 나도 한때는 웃음 꽤나 팔아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웃음 셀링을 하는 곳은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단체급식에서의 웃음 셀링 포인트가 이게 끝은 아니다. 몇 달에 한 번 있는 회식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글을 시작한 게 아니다. 영양사는 매일 점심시간에 국을 퍼준다. 피 급식자가 밥과 반찬은 본인이 직접 배식하지만 국은 마지막에 영양사에게 받는다. (나도 처음에는) 별것 아니지만 국을 퍼드리면서 '맛있게 드세요'라는 한 마디가 먹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국을 남자인 조리장이나 나이가 있는 조리원이 배식해선 안된다. 젊은 여자인 영양사가 줘야 한다고 했다. 노골적으로 웃음을 팔기를 원하는 대기업이 질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한동안 웃음과 함께 밥을 팔았다.



그렇다고 피 급식자에게 인사하며 국을 배식해주는 게 나쁜 것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런 교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 자체가 보람이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 여럿 중에서도 모양 좋고 보기 좋은 것을 선택하겠다는 뜻)라며 영양사에게 배식을 시키는 일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어떤 곳은 면접에서 '얼굴이 반반하니 딱이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내용은 모든 서비스직의 비애이기도 하고, 사무직이나 전문직인데도 젊은 여성에게만 서비스를 담당하게끔 만드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가 '영양사만 빼고 할게요' 매거진을 만드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영양사를 지망하는 여러분, (신기하게도 내 브런치에는 검색어에 ‘영양사 연봉’이라는 키워드를 치고 들어오는 사람이 꽤 많다.) 당신도 그렇게 이 글을 읽게 되셨나요? 그렇다면 연봉뿐만 아니라 어떻게 급식을 제공하게 되는지도 알고 가게되길 바랍니다. 제가 경험한 것처럼 뒤늦게 당황하지 않길 바라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그리고 이십대 영양사 여러분, 이때 써두었던 이력서는 후에 어떤 직종을 막론하고 먹히는 자기소개서가 되었습니다. 뼈대가 탄탄하므로 상황에 따라 줄이고 늘리며 계속 쓰고 있는 거죠. 여전히 자기소개서가 인상 깊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말이에요. 그러니 여러분, 대기업에 갈 생각이 없어도 대기업에 지원한다고 생각하며 이력서를 몇 천자 써놓으세요. 향후 오 년 동안 자소서 수정할 일이 없어진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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