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절기로 입춘인데 흰 눈이 내린다. 하루 종일 내린 눈은 땅과 나무 위 지붕 위에 소복이 쌓여 세상에 흰 칠을 하고 채 땅에 닿지 않은 눈은 바람을 따라 하늘로 날아간다. 흩날리는 눈은 라플란드 여행에서 만난 반짝이는 얼음눈을 떠올리게 한다.
낯선 지역 여행이라 두려움과 망설임이 많았다. 상상했던 극한의 추위를 만나 어설프게 견디려 애쓴 시간이 여행 후 더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다. 지난 1월에 다녀온 핀란드여행의 기억이 흰 눈과 함께 다시 허공에 뿌려지고 있다. 바람의 힘으로 땅에 닿지 못하고 하늘로 나르는 눈처럼 시간의 힘이 그때의 추억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봄기운이 더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려 준 눈을 보며 조금씩 담아보려 한다.
새벽 6시가 넘은 시각. 핸드폰 진동벨이 묵직하게 울렸다. 눈을 감고 받은 전화에서 아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일 밤 11시 핀란드로 출발예정이었던 비행기가 결항된다는 항공사 메일을 받았단다. 기체결함으로 비행을 할 수 없고 대체 항공편은 이틀 후에 제공한다고. 급히 구한 항공권의 출발 시간이 낮 12시 15분이니 공항으로 바로 준비해 나오라는 이야기다. 묻고 싶은 이야기가 수 많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긴박함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내려놓았다.
아들 부부와 핀란드 여행을 계획하게 된 것은 1년 전 연말가족모임에서다. 오로라를 만나는 것이 버켓리스트라고 꿈꾸듯 말하였는데 아이들이 그럼 가자고 제의를 했다. 2024년 연말과 2025년 연초 겨울은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좋은 시기라고. 이번 겨울은 11년 주기로 반복되는 태양활동 중 태양의 극대기라고 했다. 태양의 자기장이 강해지고 태양 표면 흑점 활동이 활발해지는 시기라 오로라를 볼 수 있는 확률이 높은 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농담 같던 일이 계획되었다.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곳은 캐나다, 아이슬란드도 있지만 모두 가보지 못한 나라 핀란드를 목적지로 정하였다.
아들의 전화를 끊고 일어나 거실로 나오니 시계는 새벽 6시 반을 가리켰다. 12시 15분 출발 비행기라면 3시간 전 9시에는 도착해야 한다. 집에서 공항까지 2시간 걸리니 그럼 7시에 나가야 하는데 내게 허락된 시간은 겨우 30분. 전날 여행가방을 챙기며 저녁 비행기라 여유가 있어 좋다며 던져 놓은 여행용품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비상탈출 하듯 한 번도 움직여 보지 못한 속도로 여행준비한 후 캐리어의 벌어진 입을 서둘러 닫고 집을 나섰다.
핀란드를 가기 위해 당일 예약한 항공편은 파리행이었다. 파리를 경유하여 핀란드 로바니에미 공항에 도착하는 것이다. 새벽에 티켓팅 한지 4시간 만에 에어프랑스 샤를드골공항행 수속을 마쳤다. 검색대를 지나 출국장에 들어서는데 아이들이 안도의 미소를 보냈다. 며늘아기는 이제 행복호르몬이 나오는 것 같다고 하며 공항 웰컴드링크를 먹으러 가자고 한다. 여행 출발 때 설레는 마음으로 공항에서만 먹는 음료라고. 쿨라임 피지오. 라임향이 나는 초록빛의 차고 단 음료는 새벽부터 항공편 구하느라 긴장하고 마음 졸이던 아이들의 긴장을 날릴 수 있어 보였다. 나는 그동안 좋아하지만 멀리 해온 까페라떼를 웰컴드링크로 마셨다. 아이들에게 자신만의 의식과 같은 리츄얼이 있다는 것이 흐뭇했다. 집에 아이들이 오면 만들어 주는 당근주스를 본가 웰컴드링크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짧은 순간의 작은 행복을 찾는 모습이 대견하고 기뻤다.
바뀐 일정은 파리를 경유하여 핀란드로 향하는 것이다. 13시간 비행을 해야 하기에 파리 샤롤드골공항부근 airport hotel에서 1박을 하고 아침 비행기를 이용해야 한다. 우리 짐은 최종목적지 핀란드 로바니에미에서 찾을 수 있어 최소한의 소지품을 챙겼다. 웰컴드링크를 마시며 여행자보험과 파리공항호텔을 예약한 후 서둘러 탑승하였다.
파리 도착 후 숙소를 찾아갔다. 공항 내 있는 Airport hotel이 있지만 가성비 좋은 Ibis budget을 이용했다. 가성비 좋은 대신 터미널 2에서 3으로 이동한 후 셔틀을 이용해야 했다. 셔틀 간격이 30분이라 택시를 타려 하다 우버 택시만 있어 기다려 셔틀을 이용했다.
숙소는 아담하고 깨끗했다. 냉장고도 없는 심플한 방이었다. 잠만 자기 위해 온 숙소 침대에 누우니 긴 하루의 피곤이 쏟아졌다. 한국과 8시간 시차가 있는 파리로 와서 하루가 8시간 더 길어진 32시간의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최소한의 물건으로 가볍게 1박을 한 기분은 새로웠다. 숙소를 나서며 진정 나그네가 된 듯 설레는 마음으로 셔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