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잠시 시리아 난민 구호 활동을 할 때 같이 있으면 존중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친구가 있었다. 스위스에서 온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경청해 주었고 말끝에는 항상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을 했었다.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날도 그와 대화하면 다시 기분이 좋아졌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느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우리 팀뿐만 아니라 현지 직원들 사이에서도 X는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X가 특별히 유머 감각이 있다거나 인기인이 될 자질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유일한 영업비결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집중력이었다. 그와 대화 하고 있으면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존중받는 느낌’.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내가 X를 떠올리면 미소 짓게 되는 이유이다.
매력적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가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상대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존중해 준다. 어린아이들은 신뢰와 호기심의 달인이다. 상대방이 누구인지와 관계없이 아이들은 인간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갖고 집중한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마음이 기쁘고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가진 힘은 대단하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간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잃어버린다. 신뢰했다가 상처받고, 호기심을 갖고 관심을 가졌다가 실망했던 기억들이 우리의 인간에 대한 순수한 관심을 타락시킨다. 대부분 사람은 나에게 이익이 될 만한 사람에게만 존경을 표한다. 이때도 상대에 대한 존중이라기보다는 초점이 나를 향해 있는 존중이다. 그런데도 성인이 되어서도 X처럼 타인에 대한 믿음과 존중을 간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주 귀하지만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관계를 코치하는 자기계발서들이 많지만, 그 핵심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상대를 존중하라’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아들러가 말한 관계의 비법 역시 ‘타자 신뢰’와 ‘존경’이다.
아들러는 행복의 비결은 관계에 있다며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만 집착하는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양식을 버리고 ‘타인에 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믿을 때 객관적 근거가 없더라도 조건을 일절 달지 않고 신뢰하라고 조언한다. ‘타자 신뢰’를 통해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가질 때 인간관계의 즐거움이 늘어나고, 인생의 기쁨 또한 늘어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나의 신뢰를 배신할지 말지는 상대방의 몫이므로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한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상대방이 그 사람답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배려하는 존경의 마음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아들러가 말하는 존경이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하기 위해 타인의 관심사에 귀 기울이려면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공감 능력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타인을 조건 없이 신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턱대고 무조건 신뢰하기에 세상에는 악인이 너무 많다.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사방 사건만 보더라도 순진한 어린 여자아이들을 속이고 협박하여 성 착취물로 만드는 아들러 시대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악인이 살지 않는가.
자신을 사랑한 남자를 가스라이팅 하여 이용하고 끝내 죽음으로 내몬 이은해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이 사랑하면 무조건 신뢰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신을 믿고 착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순진한 마음을 착취하고 이용하는 사이비종교를 보면서 무조건 믿으라고 말할 수 있는가.
따라서 무조건 신뢰하기 전에 신뢰해도 될 사람인지 가려낼 수 있는 분별력도 함께 기를 필요가 있다. X는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열려있는 마음으로 존경해 주었지만 부조리한 사항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요구할 줄 아는 비판적 사고도 갖고 있었다. 나는 이 분별력을 지혜라고 생각한다.
하루아침에 없던 분별력이 생기거나 타인을 깊이 있게 신뢰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성장을 믿는다. 힘들지만 조금씩 노력하다 보면 내 친구 X처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누군가에게 마음 깊이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중요한 비법을 조금이라도 터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우선 평범한 사람들인 우리는 우선 자신이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존중하는 연습부터 시작해 보자. 친구의 바운더리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처럼 원수까지 친구의 범주에 넣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조금씩 분별력을 키워가며 마음의 그릇을 넓혀 가다 보면 X처럼 어느 순간 친구의 범위가 꽤 넓어지게 되어 불안감 없이 상대를 믿고 존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