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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랴 Nov 26. 2020

굽이굽이


찌그러진 깡통 같았다, 내가. 등허리 어딘가가 찌그러져서 굽어진 채로 주춤거렸다. 찌그러짐은 불편하고 아팠다. 나는 순진하게도 병원에만 가면 명확히 진단받고 빠르게 통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자판기에 돈을 주입하고 원하는 버튼을 누르면 툭하고 차가운 음료수가 내 손에 쥐어지는 것처럼. 교통카드를 찍고 지하철에 오르면 레일을 타고 달려 원하는 장소에 도착하는 것처럼. 돈을 내고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면 통증을 무통증으로 치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병원을 찾았다. 잠을 잘못 자서 담이 왔다거나 잠시 삐끗했다고 생각했다면 한의원도 고려해보았겠지만, 무엇이 불편함을 유발하는지 알고 부숴버리겠다고 생각하니 선택지는 병원뿐이었다. 허리가 아플 땐 재활의학과를 가야 하는 건지 통증의학과를 가야 하는 건지, 아니면 정형외과를 가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 병원마다의 각 병원의 웹사이트에 접속해 진료과목을 뒤져봐도 비슷한 내용이 겹쳤고, 내 눈에는 시설과 위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해 보였다. 꼬마 때도 배가 아프면 내과를 가야 하는 건지 가정의학과를 가야 하는 건지, 아니면 소아과를 가면 되는지 고민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가장 이동거리가 짧은 곳으로 결정한다. 일정 나이가 넘으면 불분명한 경계에 있는 판단도 뚜렷하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떤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종이 접기로 동서남북 하듯 골라잡은 아무 병원. 동, 서, 남, 북. 이 중 서쪽 방향 최단거리였다. 월요일 아침 진료시간이 되자마자 갔다. 내 꼴은 누가 봐도 짠했다. 단정하거나 예쁜 건 포기했다. 아무 옷이나 걸치고 아무것이나 신었다. 맨 얼굴에 빗질 안 한 산발의 머리를 질끈 묶었다. 양치는 어려워서 가글만 했다. 양말도 단념했다. 걷는 것도 편하지 않았다. 발을 질질 끌며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원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낑낑거렸다. 


겨우 접수를 마치고도 인내해야 할 일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일단 대기실에서 편안히 진료의 순서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앉아 있기도 일어나 있기도 애매했다. 일어서 있다가 앉으면 아프고,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 아팠다. 바지에 똥이라도 싼 것 같은 엉거주춤한 모양새가 되었다. 차라리 똥 싼 게 낫다. 바지를 빨면 되니까.  그냥 어딘가에 기대어있어도 불편했다. 특정 자세로 있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몸의 정렬이 찌그러지면 찌그러지는 대로, 바르게 하려면 바르게 하려는 대로 못으로 찌르는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첫 진료인 만큼 간호사는 여러 가지를 질문했다. 

“통증은 언제부터 느껴졌어요?”

“특히 어떨 때 아픈가요?”

“아프다는 게 어떤 느낌이에요?”

“아픔을 0부터 10까지 중에 점수를 매기면 몇 점 정도 될까요?”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나요?”

그리고 생각나지 않는 질문들이 더 있었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일어서는 일이 곤욕이었다. 일어나서 대답하려다가도 내 반응속도가 너무 느려서, 선생님은 결국 내가 앉아있는 자리까지 오셔서는 답을 듣고 돌아섰다. 천천히 움직여도 된다고 배려해주시기도 했다. 익숙하고도 상냥하게 대응해주셔서 고마우면서도, 덤덤한 태도가 낯설었다. 나에겐 별일이지만, 이분들은 매일 나 같은 환자들을 보는 것이 일상이기 때문인가.


또 다른 관문도 있었다. 진료 전에 엑스레이를 찍어야 했다.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서는 상의도 탈의하고 검사용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옷이 나를 거쳐 빠져나오고, 내가 다른 옷을 통과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접수부터 검사, 진료의 순서는 필요한 과정이었지만 당장 몸이 아픈 나로서는 번거롭고 고통스러웠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대기실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진료 순서가 되어 대기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집에 갈 뻔했다.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집에 안 가고 기다린 이유는 뻔했다. 일어설 수가 없어서. 걷는 데까지는 다시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 며칠이나 겪은 고통인데도 익숙지가 않았다. 신이 있다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상 없는 원망감이 생겨났다. 


진땀을 흘리며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정말 많이 불편하신가 보네요'라고 말을 건네며, 능숙하게 내 엑스레이 사진을 하얀 불빛 위에 얹었다. 내 옆모습과 척추의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은 내 척추 마디와 마디 사이의 간격을 유심히 보시더니, 등과 허리가 자연스러운 본연의 굴곡 인지도 확인했다. 허리가 좀 일자네, 간격은 좋아 보이지 않지만 이 정도는 누구나 이래요.라고 하면서 순식간에 진료가 끝이 났다. 아리송하게도 병명을 제대로 듣지 못한 채로. 통증을 내리는 주사와 진통제를 처방해주겠다고 했다. 주사를 맞고 나면 당장 많이 편해질 거라고도 했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다. 뭐라도 좋으니까 이 통증을 줄여주기를. 조선시대엔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양반들을 위해서 곤장을 맞고 돈을 받았던 매품팔이가 있었다더니. 바르게 걷고, 제대로 서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얼마라도 괜찮았다. 누군가에게 빚을 졌을 때 차라리 그 사람이 한 대 시원하게 치면 뭐라도 갚은 것 같지 않은가. 인간의 품위는 혼자 움직일 수 있어야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랬다. 


엎드리라고 해서 자연스레 주섬주섬 바지를 내렸는데, 거기가 아니라고 했다. 그 와중에도 귀까지 열이 올라왔다. 민망해라. 허리나 꼬리뼈 근처에도 주사를 맞을 수 있는 것이란다. 그렇게 긴 바늘도  처음 보았다. 보지 않는 게 나았다. 등 위엔 알 수 없는 기계가 움직이고 내 눈앞엔 내 척추 뼈가 나오는  영상화면이 나왔다. 주사라더니 의사 선생님은 장갑도 끼고, 마스크도 끼고, 소독약으로 내 등도 문질렀다. 무슨 주사가 이렇게 본격적이냐. 아픈 예방 접종도 무던하게 잘 맞아오던 난데, 허리에 차갑고 기다란 바늘이 닿을 때마다 긴장을 놓지 못해 부르르 떨었다. 주사액이 허리 어딘가를 타고 들어가면 골반 앞 쪽이 먹먹하기도 했다. 어떤 부위는 허벅지부터 종아리로 내려가는 방향으로 찌릿한 느낌이 있었다. 꼬리뼈 부근에 바늘이 들어왔을 땐 난생처음 느껴보는 신경통이 머리 끝까지 강하게 뻗쳤다. 눈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나만 벼락 대잔치야.

 

약물이 들어갔다고 해서 허리는 뿅 하고 단숨에 좋아지진 않았다. 나는 주사를 맞은 다음 날, 전날보다 몸이 더 짓이겨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껴야 했다. 어떻게든 뭔가로 배를 채우고 주기적으로 진통제를 털어 넣었다. 밥을 충분히 먹고 약을 먹어도 속은 편하지 않았다. 위까지 아파왔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서러움 대잔치였다. 위장약부터 털어 넣고 진통제도 털어 넣었다. 다른 수가 없으니까. 안 괜찮은 상태가 몇일쯤 지나가고 나서는,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모르겠다 싶은 상태로 몇 주쯤을 더 보냈다. 방심을 하고 세수라도 하려고 들면 번개처럼 빠직하는 통증이 올라왔다. 간헐적인 통증은 날카로웠고 만성적인 통증은 욱신거렸다. 허벅지 어드메가 저린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통증이 세상에서 가장 눈치 없고 부지런했다. 


이후에도 나는 같은 절차를 셀 수 없이 반복했다. 지하철에서 내렸는데 갑자기 파직하고 통증이 느껴져서, 계단을 올라가기 어려운 처지에 있던 적도 있었다. 날카롭고 강한 통증이 나를 베고 무겁고 짓누르는 우지끈한 통증이 미적미적거렸던 일도 많다. 의자에 앉아있다가 등이 깨질 것 같기도 했고,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아파지기도 했다. 통증은 한 번 느껴지면 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제멋대로 거슬렸다. 그럴 때마다 첫 진료와 똑같은 사이클을 반복했다. 어떻게든 몸을 질질 끌고 무슨 치료든 받았다. 물리치료도 받았고, 도수치료도 받았다. 근육을 풀어주는 운동을 배워서 집에서도 매일 했다. 남과 같은 일상도 포기하고 앉아있는 시간도 줄였다. 하지만 통증은 쉽게 다시 찾아왔고 그 주기에는 규칙성도 없었다. 화산이 터지듯 통증은 터지면 그만이었다. 공포스럽고 서럽기는 처음과도 매한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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