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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May 26. 2021

책과 이별했다

삶에 대한 열정과도


세상에서 사랑한 게 몇 있다. 책. 흰 밥. 면. 그들과 이별했다. 암에 걸린 이후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그래서 고민한다. 아프지만 할 수 있는 일. 아프지만 해야 하는 일. 사랑과 열정을 되찾는 일. 그 길목에 책이 있다.


책에 대한 열정은 삶에 대한 열정이다.



세상에사랑한 게 몇 있다. 책. 흰 밥. 면. 그들과 이별했다. 암에 걸린 이후로. 그들이 암의 원인일 리는 없는데. 그건 내가 잘 안다. 그럼에도 제일 쉬운 게 남 탓. 그들 탓으로 돌리기로 했다. 책 보느라 운동 안 했지? 운동은 원래 싫어한다. 흰 밥밀가루가 몸에 안 좋은 것도 알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먹고 산다. 운동 안 하는 사람들도 많고. 몸이 찬 건 사실이다.  경우엔 그래서 불임이었다. 고로 자궁에 암이 생긴 건 이해가 다. 상쾌하고 명쾌하게. 유쾌나 통쾌까지는 아니고.


글과는 아직이다. 이별을 고하지 못했다. 사실은 이게 더 직접적인 원인 같은데. 독일 와서 3년 동안 글만 썼다. 대단한 것도 없는 일상을. 뭘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 그러느라 집콕으로 살았다. 때론 카페콕으로. 그 둘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갔다. 나름 열심히 거라고 우겨볼 수는 있겠. 그러느라 병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어떤 이는 영양가 없는 알바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라고도 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도 얻은 건 있다. 독일어가 나아졌다. 안 그랬으면 코로나 시대의 병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보호자 없이 환자 들어가 상황을.


먹는 거야 그렇다 치고 책은 멀리 했다고 당장 표가 나지는 않는다. 이런 건 천천히 온다. 대표적인 증상을 꼽자면 마음이 허함. 뭘 먹긴 는데 포만감이 생기지 않는다 할까. 방금 먹고 일어났는데 돌아서자 허기가 진다고 할까. 매력적인 남주 서인국이 나오는 드라마 <멸망이 찾아왔다> 보며 낄낄거리고, 좋아하는 가수 이승윤이 나오는 <유명가수전>을 보며 기분을 전환하는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뭔가. 날이 추워서 그런 거라고 해두자. 산책할 때 책을 들고나가려니 무거워서. 아직 카페에 앉을 없어서. 노천 테이블은 춥고, 카페 안은 못 들어가니까.


유월이 오면, 날씨가 좋아지면 그땐 무엇으로 나를 설득하. 몸을 빠져나간 열정은 언제 살아날까. 잃어버린 입맛이 되돌아오듯 쉽게 돌아올까. 아니라면? 내가 두려운 건 그 지점이다. 아니면 어떡하나. 살면서 입맛을 잃은 적은 없다. 한국에 도착한 후 시차 때문에 고생하던 올봄 말고는. 생애를 통틀어 그랬다. 입맛을 잃는다는 느낌알지 못했다. 책도 그렇다. 살면서 책 맛을 잃은 적이 있던가. 그럴 리가! 책은 때로 보다 사람보다 위안을 주는 존재였다. 그 맛을 최근에 잃어버렸다. 암에 걸린 이후 반년 동안. 그래도 되나? 아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그래서 고민한다. 아프지만 할 수 있는 . 아프지만 해야 하는 일. 두 가지가 있다. 사랑열정을 되찾는 .  길목에 책이 있다.



책을 펼치니 오래 전에 친구가 준 핸드 메이드 한지 봉투가 나왔다. 나의 잃어버린 시간들.



잃어버린 열정을 어떻게 찾 수 있을까. 나의 원픽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럴 때 프루스트보다 나은 선택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솔직히 한 번도 완독은 못했다. 그래서 시작한다. 성공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다시 실패한다  포기하지 않기. 도전하고 또 도전하기. 살아보니 중요하더라. 책에 대한 열정이 삶에 대한 열정이라서. 열정이 있어야 사랑도 생겨나지. 인간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경이.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경외. 열정에 관한 건 산책을 하다 갑자기 떠올랐다. 항암 핑계 대고 밥만 열심히 축내고 구나. 뜬금없이 대학 시절 동기와 선배와 후배들 생각도 났다. 언니와 다시 본 <응답하라 1997>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의 잃어버린 시간들. 열정 없이 지금도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순간들.


비타민 C 보조요법을 맞으며 프루스트를 읽는다. 한 팔엔 주삿바늘, 손엔 . 1시간에 40쪽. 느리지만 어떤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일과 서두름은 어울리지 않는다. 꾸준함. 언젠가 인용한 적이 있는 대목에서는 여전히 가슴이 뛴다. 스완의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였던 화자의 할아버지. 밤낮으로 간호하던 아내가 세상을 떴을 때 스완의 아버지가 보인 태도. 할아버지가 소식을 듣자마자 콩브레 근교 스완 씨네 소유지로 달려갔을 때. 눈물에 젖은 그를 입관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잠시 빈소 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 두 사람이 햇빛 비치는 정원을 몇 발자국 거닐다 갑자기 스완의 아버지가 할아버지 팔을 잡으며 환호하며 소리칠 . 그러다 죽은 아내의 추억이 떠올라 어떻게 이런 순간에 즐거운 마음이 들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할 때.



"아! 이보게, 이런 좋은 날씨에 함께 산책하다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자네는 이 모든 나무들이며 산사나무들, 그리고 자네가 한 번도 칭찬한 적 없는 이 연못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자네는 침통한 표정이구먼. 이 산들바람을 느끼는가? 아! 누가 뭐래도 사는 건 좋은 거라네, 내 친구 아메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역, 민음사)






핑스턴 방학이다. 핑스턴 로젠의 계절, 작약절. 아이는 새로 주문한 책 세 권을 들고 선언했다. 첫 주는 무조건 쉬고, 둘째 주에는 공부를  하겠다고. 누가 뭐랬나. 자기 공부는 자기가 하는 거지. 올여름까지 영어 어휘만 봐줄 생각이다. 라틴어는 내가 건강해지면 같이 공부해 볼 생각도 있는. 월요일이 '핑스턴 월요일'로 공휴일이었다. 이번 주 항암도 하루가 연기되었다. 오늘은 피검사. 내일은 세 번째 항암. 센 약이라 조금 긴장된다. 주말에는 가발 가게에 들러 쓸 만한 것을 두어 개 봐 두었다. 검은 머리는 아니지만 짙은 색으로. 핸드 메이드 가격은 1,000유로. 싼 건 반값이라고. 의사의 처방전이 있으면 건강보험에서 절반 정도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 이럴 때 독일은 좋은 나라. , 화는 다음날 항암을 위해 드라마 <멸망>과 <유명가수전>으로 기분을 시킨. 내 귀엔 캔디. 내 손엔 책. 내 맘엔 희망. 멸망 같은 건 말고.



아침엔 빵, 영혼엔 책. 검은 건 아메리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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