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사랑한 게 몇 있다. 책. 흰 밥. 면. 그들과 이별했다. 암에 걸린 이후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그래서 고민한다. 아프지만 할 수 있는 일. 아프지만 해야 하는 일. 사랑과 열정을 되찾는 일. 그 길목에 책이 있다.
책에 대한 열정은 삶에 대한 열정이다.
세상에서 사랑한 게 몇 있다. 책. 흰 밥. 면. 그들과 이별했다. 암에 걸린 이후로. 그들이 암의 원인일 리는 없는데. 그건 내가 잘 안다. 그럼에도 제일 쉬운 게 남 탓. 그들 탓으로 돌리기로 했다. 책 보느라 운동 안 했지? 운동은 원래 싫어한다. 흰 밥과 밀가루가 몸에 안 좋은 것도 알지? 다른 사람들도 다그렇게 먹고 산다. 운동 안 하는 사람들도 많고. 몸이 찬 건 사실이다. 내 경우엔 그래서 불임이었다. 고로 자궁에 암이 생긴 건 이해가 간다. 상쾌하고 명쾌하게. 유쾌나 통쾌까지는 아니고.
글과는 아직이다. 이별을 고하지 못했다. 사실은 이게 더 직접적인 원인 같은데. 독일 와서 3년 동안 글만 썼다. 대단한 것도 없는일상을. 뭘 썼는지잘 기억도나지 않는. 그러느라 집콕으로 살았다. 때론 카페콕으로. 그 둘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갔다. 나름 열심히 산 거라고 우겨볼 수는 있겠다. 그러느라 병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어떤 이는 영양가 없는 알바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라고도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도 얻은 건 있다. 독일어가 나아졌다. 안 그랬으면 코로나 시대의 병원생활에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보호자 없이 환자만들어가는 이상황을.
먹는 거야 그렇다 치고 책은 멀리 했다고 당장 표가 나지는 않는다. 이런 건 천천히 온다. 대표적인 증상을 꼽자면마음이 허함. 뭘 먹긴 했는데 포만감이 생기지 않는다할까. 방금먹고 일어났는데돌아서자허기가 진다고 할까. 매력적인남주서인국이나오는드라마 <멸망이 찾아왔다>를보며 낄낄거리고, 좋아하는 가수이승윤이 나오는 <유명가수전>을 보며 기분을 전환하는 것으로도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날이 추워서 그런 거라고 해두자. 산책할 때 책을 들고나가려니 무거워서. 아직 카페에 앉을 수가 없어서. 노천 테이블은 춥고, 카페 안은 못 들어가니까.
유월이 오면,날씨가 좋아지면 그땐 무엇으로 나를 설득하나. 몸을 빠져나간 열정은언제 되살아날까.잃어버린 입맛이 되돌아오듯 쉽게돌아올까. 아니라면? 내가 두려운 건 그 지점이다. 아니면 어떡하나. 살면서 입맛을 잃은 적은 없다. 한국에 도착한 후 시차 때문에 고생하던 올봄 말고는. 생애를 통틀어 그랬다. 입맛을 잃는다는 느낌을 알지못했다. 책도 그렇다. 살면서 책 맛을 잃은 적이 있던가. 그럴 리가! 책은 때로밥보다 사람보다 위안을 주는 존재였다. 그 맛을 최근에 잃어버렸다. 암에 걸린 이후 반년 동안. 그래도 되나? 아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그래서 고민한다. 아프지만 할 수 있는 일.아프지만 해야 하는 일. 두 가지가 있다. 사랑과 열정을 되찾는 것. 그길목에 책이 있다.
책을 펼치니 오래 전에 친구가 준 핸드 메이드 한지 봉투가 나왔다. 나의 잃어버린 시간들.
잃어버린 열정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나의 원픽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럴 때 프루스트보다 나은 선택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솔직히한 번도 완독은 못했다. 그래서 시작한다. 성공할 수 있을까. 장담할수 없다. 그래도상관없다. 다시실패한다해도포기하지 않기. 도전하고 또 도전하기. 살아보니그게 중요하더라. 책에 대한 열정이 삶에 대한 열정이라서. 열정이 있어야 사랑도 생겨나지. 인간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경이.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경외. 열정에 관한 건 산책을 하다 갑자기 떠올랐다. 항암 핑계 대고 밥만 열심히축내고 있구나. 뜬금없이 대학 시절 동기와 선배와 후배들 생각도 났다. 언니와 다시 본 <응답하라 1997>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의 잃어버린 시간들.열정 없이 지금도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순간들.
비타민 C 보조요법을 맞으며 프루스트를 읽는다. 한 팔엔 주삿바늘,한 손엔책. 1시간에 40쪽. 느리지만 어떤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일과 서두름은 어울리지 않는다. 꾸준함이 답.언젠가 인용한 적이 있는대목에서는 여전히 가슴이 뛴다. 스완의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였던 화자의 할아버지. 밤낮으로 간호하던 아내가 세상을 떴을 때 스완의 아버지가 보인 태도. 할아버지가 소식을 듣자마자 콩브레 근교 스완 씨네 소유지로 달려갔을 때. 눈물에 젖은 그를 입관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잠시 빈소 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 두사람이 햇빛 비치는 정원을 몇 발자국 거닐다갑자기 스완의 아버지가 할아버지 팔을 잡으며 환호하며소리칠때.그러다 곧 죽은 아내의 추억이 떠올라 어떻게 이런 순간에 즐거운 마음이 들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당황할 때.
"아! 이보게, 이런 좋은 날씨에 함께 산책하다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자네는 이 모든 나무들이며 산사나무들, 그리고 자네가 한 번도 칭찬한 적 없는 이 연못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자네는 침통한 표정이구먼. 이 산들바람을 느끼는가? 아! 누가 뭐래도 사는 건 좋은 거라네, 내 친구 아메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역, 민음사)
핑스턴 방학이다. 핑스턴 로젠의 계절,작약의 시절. 아이는 새로 주문한 책 세 권을 들고 선언했다. 첫주는 무조건 쉬고, 둘째 주에는 공부를 좀하겠다고. 누가뭐랬나. 자기 공부는 자기가 하는 거지. 올여름까지 영어 어휘만 봐줄 생각이다. 라틴어는 내가 건강해지면 같이 공부해 볼 생각도 있는데. 월요일이 '핑스턴 월요일'로 공휴일이었다.이번 주 항암도 하루가 연기되었다. 오늘은 피검사. 내일은 세 번째 항암. 센 약이라 조금 긴장된다. 주말에는 가발 가게에 들러 쓸 만한 것을 두어 개 봐 두었다. 검은 머리는 아니지만 짙은 색으로. 핸드 메이드 가격은 1,000유로. 싼 건 반값이라고. 의사의 처방전이 있으면 건강보험에서 절반 정도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이럴 때 독일은 좋은 나라.월, 화는 다음날 항암을 위해 드라마 <멸망>과 <유명가수전>으로 기분을 업 시킨다. 내 귀엔 캔디. 내 손엔 책. 내 맘엔 희망. 멸망 같은 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