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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Jul 12. 2021

항암 때는 맑은 날도 흐린 날도 비 오는 날도 있다

현경네를 만나다


매주 항암을 하는 단순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어떤 날은 맑고 어떤 날은 흐리고 어떤 날엔 비를 맞기도 한다. 일이 꼬인 다음날에 현경네를 만났는데 장마철에 해를 보듯 반가웠다.



비 온 뒤 산책길 웅덩이에 담긴 수채화 한 점!



어쩌다 그 날이 있다. 아침부터 안 풀리는 날. 이런 날씨와도 무관하지 않다. 요즘 뮌헨에는 자주 비가 내린다. 이번 주도 다음  계속 소식이다. 해가 나오는 날은 일주일에 한두 번. 여름 장마가 없는 독일은 하루 종일 장대비가 쏟아지거나 밤새워 내리는 경우가 드물다. 비는 내리다가 그치고 흐리다가 내리고를 반복할 뿐이다. 먹구름을 머리 위에 이고 하루 종일 맑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주말에 반짝 해 소식이 있는 날은 뮌헨 시내 야외 수영장 온라인 예약에 불꽃이 튄다.


날씨를 빼고도 나에게는 징크스가 있는데 집을 나설 때 가방 속에 책이 한 권 들어있어야 한다는 . 읽든 말든 상관은 없다. 와이파이 폰 배터리가 없을 때, 자투리 시간이 생겨 책을 읽고 싶은 순간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꼬이는 날은 책을 안 들고나갔을 . 지난주에 비타민 C 요법을 받으러 가는 날이 그랬. 집 앞 이태리 레스토랑 앞에서 지하철 역이 있는 콜럼버스 슈트라세 쪽으로 방향을 꺾을 때였. 평소보다 가방이 가벼웠. 아니나 다를까 읽던 책이 없었다. 돌아가자니 시간이 촉박하고 그냥 가자니 찝찝했. 그래도 어쩌나. 나이 많은 독일 여의사는 늦는 걸 싫어했다.



비타민 C 요법 진료실. 저기에 안 눕고 의자에 앉아서 주사를 맞는다(왼쪽). 진료실 벽에 걸린 사진(오른쪽).



비타민 C 요법을 받을 때는 노란색 강황으로 시작해서 흰색의 비타민 C로 마무리한다.  다 링거로 맞는데 소요 시간은 대략 1시간. 그날도 의사 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기분 좋게 시작했. 강황의 오일 방울은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폰으로 브런치에 글을 쓰다가 남편의 전화를 받은 게 화근이었. 주사기를 꽂고 있던 왼팔이 살짝 움직였던 모양이었다. 강황액떨어지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 내가 폰으로 글 쓰 못마땅했던지 의사가 이러다 오전 내내 걸리겠다고 짜증을 내는 순간 남편 전화를 받은 걸 이실직고함. 문제는 남편과 의사였다. 처음부터 둘은 맞지 않았다.


 상담을  날 남편이 의사의 가방을 내 가방인 줄 상담실에서 들고 나온 이후로. 그게 뭔가. 2인조 사기단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말이다. 우리 남편은 가끔 대책이 없을 때가 있는데 아내가 뭘 들고 다니는지 뻔히 보면서도 모를 때가 다. 눈은 왜 달고 다니나? 머리는? 뇌는? 이런 걸 인지 부조화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그날 나는 짙은 청색 백팩을 있었다. 그날만이 아니고 당시거의 매일. 의사의 가방은 베이지색이었다. 백팩도 아니고. 의사가 볼 때 정말 이상하지 않았. 내 남편이지만 이건 나도 인정!



내 기분전환을 위해 언니가 사 온 장미와 라벤더.



그게 다가 아니다. 독일 병원은 당일 현장 결제가 아니고 추후 집으로 영수증을 보낸다. 그것도 우편으로. 그리고 송금하는 시스템. 이상하게 일을 복잡하게 . 한국처럼 즉석에서 현금이든 카드든 결제하면 간단할 텐데. 우리 남편은 전형적인 공대생이다. 책상 위에도 집안 곳곳에도 공구가 가득하다.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도 잘 잊어먹는다. 의사가 영수증을 봉투에 넣어 내게 주었는데 남편 손 넘어간 후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남편이 영수증을 메일로 보내달라 부탁하니 그건 안 된단다. 다시 영수증 출력. 영수증 받고 입금 독촉도 두 번이나 받았다. 보통은 여유 있게 송금해도 되는데. 결론은 둘이 서로 안 맞았.


또 있다. 이번엔 남편이 전적으로 의사를 신뢰하지 못한 사례다. 맨 처음 의사는 비타민 C를 항암 포터로 주입할 거라며 주치의에게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서 오라고 했다. 처방전이 있으면 개인이 비용을 부담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요법을 반대하는 우리 주치의가 싫은 내색을 했지만 어찌어찌 주사 바늘을 한 통 사갔다. 문제는 두 번이나 내 포터에 꽂는데 실패하신 것. 엉뚱한데 찔러서 아파 죽는 줄 알았다. 의사가 아무 설명도 없이 다시 정맥 주사로 돌아간 것도 남편의 오해를 불렀다. 대체 지? 그 와중에 화룡정점은 지난주였다.



요즘 아이가 읽고 있는 책 시리즈.



성격이 급한 의사 샘이 주사 바늘을 뽑더니 내 양팔에 다섯 번을 찔렀지 성공하지는 못했다. 내 팔에서 정맥 찾기가 어렵다는 건 나도 안다. 그래도 그렇지. 날이면 날마다 주사 놓는 게 독일 의사들 일인 줄 알았는데. 실패할 때마다 의사의 태도에 조급함이 더해졌다. 결국 다섯 번만에 포기. 강황이 떨어지는 속도는 처음과 똑같았고, 9시 30분에서 12시 20분까지 총 세 시간이 걸렸다. 찬바람이 나도록 생하게 강황 링거를 빼서 말없이 돌아서는 60대 중반 여의사에게 말을 걸기란 쉽지 않았다. 이분들은 갱년기를 60대에 하시나? 비타민 C는 아무 설명도 없길래 못 맞고 돌아왔다. 집에 와서 내 팔뚝을 보던 남편이 고개를 저었다.


마리엔 플라츠 앞 서점 후겐두벨에서 만나기로 한 언니는 1시간 반을 기다려야 했다. 악재는 계속되었다. 비타민 C를 맞고 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3층에서 내림. 3층에 멈췄는데 1층인 줄 알고.  수 없이 걸어서 내려옴. 마리엔 플라츠 우반역에서는 출구 반대편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높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옴. 출구는 반대쪽 플랫폼으로 나가야 했다. 언니와 마리엔 플라츠 앞 백화점 카우프 호프에서 접이 산을 사려다 양심까지 접은 가격에도 놀람. 무슨  하나가 39.99€ 아니면 49.99€냐고. 그나마 기분이 았던 건 아이 책을  때였다. 최근에 아이가 푹 빠져 시리즈인 돈이 아깝지 않았(450p/17€).



빅투알리엔 부근 베트남 식당(위). 퀸의 프레디 머큐리도 와서 먹고 갔다는 독일 도너츠 빵집 카페(아래).



서점에 나타난 내 얼굴을 보고 언니가 밥부터 먹자고 했다. 맛있는 걸 먹어야 기분이 좋아진다면서. 이럴 땐 언니 있는 사람이 최고다. 빅투알리엔 마켓 옆에 있는 내가 좋아하는 베트남 식당에 갔다. 그날은 점심 추천 메뉴도 있었다. 코로나 기간에 리노베이션을 하고 가격대가 높아지고, 저렴한 런치 메뉴도 없어졌는데 단골들을 위해 다시 부활한 모양이었. 구운 오리 고기와 면과 신선한 야채에 상큼한 소스를 섞어먹는 메뉴였다. 이름은 Vit Thap Cam. 너무 맛있어서 사진 찍는 것도 잊었다(내가 매번 주문하는 치킨 카레는 지난번에 찍은 사진으로 대체함). 밥을 먹은 후에는 유명한 독일 도넛 카페로 갔다. 벽에 차값이 2.90이라고 적어놓고 3.40을 받길래 연유를 물었다. 오래전에 만든 가격표라서 그렇단다. 오케이. 궁금한 건 물어서 푸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저녁에는 비가 오는데 남편과 산책을 갔다. 7월부터 뮌헨에도 영화관이 오픈했다(뮌헨 영화제도 열리고 있다). 산책 후 남편은 영화관을 가고 나는 집으로 왔다. 그날 남편이 본 영화는 <블랙 위도우>. 남편에게는 머리를 식히는 효과가 있는 묻지 마, 류의 영화였고, 나는 흥미를 못 느끼는 장르였다. 남편과 손을 잡고 빗속을 걷는데 이런 날이 오리라  못꾸었던 한국에서의 봄날도 생각났다. 내가 운이 좋구나! 가족이든 친구든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오래 살 것 같다. 다음 날도 산책길에 비가 왔는데 나서자마자 날이 개었다. 런 날은 이자르 강변 오솔길 산책길에서 만나는 타인들의 뒷모습까지 해맑다.



이자르강 산책길에서 만나는 사람 풍경 그중에 독보적인 건 까마귀의 위엄.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도 있고 비 오는 날도 있듯이 다음 날엔 현경네를 만났다. 얼마 만인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랜만이었다. 그 사이 현경 아빠의 독일 근무가 결정 났고, 몇 달 만에 슈탄베르크에 살 집을 찾았고, 이사까지 마쳤다. 독일 이사가 어떤지 아는 내가 남편이라도 보낼까 물었지만 현경네는 누구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해냈다. 독일에서 포장 이사는 어림도 없다. 회사에서 지원을 해주지 않는 이상 비싸도 너무 비싸기 때문이. 이삿짐을 싸고, 며칠을 나르고, 살던 집과  집 두 군데 청소까지 마쳤단다. 말이 쉽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대단한 일을 해치우고도 이삿짐 정리는 또 얼마나 지난한 과정일 것인가.


만남은 갑자기 이루어졌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언제 얼굴을 보나 하다가 당장 다음날 보기로 했다. 이런 게 한국식이지! 독일 사람들과그렇게 안 된다. 그날은 비가 다가 그쳤다가 현경네가 도착한 늦은 오후에는 해까지 나왔다. 현경네가 사 온 피자와 우리 언니가 준비한 과일들이 차례로 식탁에 올랐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밀린 안부가 많아서, 지난날들을 소환하기에는 한나절이 턱 없이 짧아서, 시간은 저녁 8시가 고 밤 10시가 되었다. 그러고도 작별의 시간은  박자 늦게 찾아다. 찬란했던 유월의 장미처럼 이야기꽃이 피고 지기를 거듭한 후에, 시작이 어긋나끝이 원만하기 어렵더라는 따뜻한 충고와, 자주는 아니더라가끔 얼굴을 보며 살자는 약속과 함께.



로젠 가르텐의 유월의 장미. 지금은 거의 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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