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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Jul 08. 2021

나는 항암 반대주의자였다

지금은 반대하지 않는다



고백하자면, 나는 항암 반대주의자였다. 지금은? 예찬까지는 아니지만 항암에 반대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복부 재수술을 받고 당장 항암을 시작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도 뿌리치고 독일로 돌아온 건 잘한 선택이었다. 독일에 한 발을 내딛는 순간 항암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용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피검사를 한 어제 저녁.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진 후에 무지개를 보았다.



일곱 번째 항암을 했다. 기억하기 좋은 숫자인 칠월 칠일에.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월 칠석은 아니다. 그날은 음력이다(올해는 8월 14일). 피검사 결과 백혈구 수치는 3.4였다. 전날 피검사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 산책을 하는데도 병원에서 연락이 없었다. 됐구나, 싶었다(항암을 못 하게 되면 반드시 전화로 알려준다). 그렇다고 내 쪽에서 전화를 걸어 확인하지는 없었다. 두렵고, 때로는 모르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으니까. 어제 피검사를 마치자 호중구 주사도 하나 더 주셨다. 담주에도 맞고 오란다. 마리오글루 샘 목소리가 어찌나 모기만  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요점은 면밀히 신경 쓰고 있다, 정도. 항암약이 잠을 부르는지 책은 같은 페이지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갔다.


이번 주 호중구 주사는 항암 날인 오늘 아침에 맞고 갔다. 전날 피검사를 할 때는 호중구 주사를 못 맞았다. 남편이 새벽에 출근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다. 예전에 시험관을 할 때는 혼자서도 복부 주사를 잘만 놓았는데 이번에는 안 된다. 주사란 남이 놓아주게 정석인가 보다. 자신을 찌르기가 쉽나. 나이가 들수록 더더욱 겁쟁이가 다. 독일은 주사는 반드시 의사가 놓는다. 어제는 마리오글루 샘이 피를 뽑았다. 왼팔에 찔렀으나 불발. 오른팔로 옮겨 성공. 거듭 안하다고 사과 하심. 그 정도쯤이야.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 있으니까. 내 핏줄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웬만해서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비싸게 군 결과는 팔뚝에 피멍을 남겼다.


병원에서 2주마다 코로나 검사도 한다. 입 안과 코 안 두 쪽을. 괴롭다. 아무리 맞아도 적응이 안 된다. 간호사도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내 경우엔 화이자 백신을 두 차례 다 맞았다. 그래도 코로나 검사가 필요하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무뚝뚝한 간호사가. 우리도 2주마다 맞아요. 아, 그러시군요. 순간 조의를 표할 뻔했다. 생각만 해도 힘들겠다. 마리오글루 샘께 비타민 D와 셀레늄 복용 사실도 알린다. 비타민 C 치료에 대해 시큰둥하셔서. 잘했네요! (참고로, 셀레늄은 부종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백신 2차 접종 완료. 나는 두 번 다 화이자(독일명은 비욘테크)를 맞았고, 남편은 1차 아스트라제네카, 2차 화이자를 맞았다. 교차 접종이 더 효과가 크다면서 만족하는 분위기. 시누이는 우리 가족 중 유일한 백신 접종 반대주의자.



로젠 가르텐엔 칠월의 장미도 아름답고,


월요일 오전 비타민 C 요법을 갔다. 짧은 회색 머리칼의 나이 드신 여의사 샘이 안부를 물었다. 아주 좋다고 대답하니 놀라심. 매번 같은 대답을 하는데 왜 놀라실까. 뼈주사 후 경과도 궁금해하셨다. 첫 뼈주사 이후 가슴뼈 통증 90% 사라짐. 두 번째 뼈주사 이후 간헐적으로 있던 통증도 사라짐. 부작용 없음. 나는 뼈주사를 맞는 모든 환자들이 그런 줄 알았다. 의사 샘 왈, 아니란다. 암 센터 근무 25년 경력의 그녀에 의하면 뼈주사를 맞고 부작용에 시달리는 환자들도 있다고. 예를 들면 심한 근육통 같은. 나는 대체로 잘 받는 케이스 같다고 했다. 항암도 뼈주사도.


오후에는 림프 마사지를 받았다. 마사지를 해주는 여자분이 또 놀라신다. 뼈주사와 항암을 연달아 맞았다고요? 네. 괜찮았나요? 네. 아,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괜찮았다. 림프 마사지를 이 분과 계속할지 말 지를 고민한 적도 있다. 그녀는 중년 여성으로 혼자 물리치료실을 운영하는데 경력이 26년쯤 된다. 손이 금손이다. 마음에 든다. 다만 시간관념이 조금 그런데 1시간짜리 마사지를 10분~15분 정도 잘라 드신다. 이유를 물으니 결론적으로 림프 마사지는 고난도 마사지라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뜻. 그럴 수도 있겠다. 남은 시간은 발목 운동과 어깨 돌리기, 복식 호흡으로 채운다. 기분 나쁘지 않냐고? 아니, 괜찮다. 잃어버린 10분이 억울하지 않을 만큼 잘하니까!


한국에서 사 온 기능성 신발 '슈올즈'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야겠다(제품 홍보 아님!). 언니와 나는 사람도 예민한데 발까지 예민한 편이다. 특히 걷고 나면 나는 발바닥이, 언니는 발 바깥쪽 날이 아팠다. 구두는 일찌감치 접었고, 언니는 주로 운동화를, 나는 캠퍼 단화를 신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 집에서 저녁을 먹던 언니가 <생로병사>에서 기능성 신발에 대해 알게 되었다(알고 보니 <김주희의 솔깃>이라는 방송이었다. 유튜브로도 검색이 가능함). 놀려고 갔던 한국에서 복부 재수술을 하고 매일 공원을 걸어야 할 때 언니가 그 신발을 생각해냈다. 근처에 오픈한 지 얼마 안 되는 오프 매장도 있었다. 착한 가격은 아니었다. 나는 최신형(블루/베체 스포츠)을 29만 원에, 언니는 재고 운동화(블랙/하이스타 논슬립)할인가인 20만 원에 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기능성 신발 '슈올즈'의 마니아가 되었다.  신발을 신은 지 석 달. 우리는 발바닥과 발 날은 물론 가끔 불편하던 무릎까지도 괜찮아졌다. 요즘도 산책은 물론 외출할 때도 신는다. 앞으로도 마르고 닳도록 신을 예정이다(검색해 보니 기능성 신발 브랜드가 다양하고 혹시 궁금한 분이 계실 지도 몰라서 해당 브랜드명/제품명을 추가로 올린다).



유월의 장미도 아름다웠다.



고백하자면, 나는 항암 반대주의자였다. 지금은? 항암에 반대하지 않는다. 내가 항암을 안 한다고 선언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뮌헨에 사는 한국 가족, 현경네 아빠였다. 그는 간곡하게 조언했다. 고령이신 자기 어머니도 혈액암과 폐암을 수술과 항암으로 거뜬히 이겨내셨다고. 그러니 꼭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라고. 솔직히 말하자 나는 무서웠다. 항암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항암과 함께 자리에 누워 못 일어나면 어쩌나 두려웠다. 봄에 한국에서 복부 재수술만 받고 당장 항암을 시작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도 뿌리치고 독일로 돌아온 건 잘한 선택이었다. 독일에 한 발을 딛는 순간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용기가  자리를 차지했다.


또 있다. 어느 구독자의 댓글.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고 악플이라고 부를 것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혼자 읽고 조용히 지웠다. 요지는 자연치료 강조하다가 골로 가는 사람 많이 봤다는 말씀. 그 말에 간담이 서늘하고 등짝에는 진땀이 흐르더라. 먼 데서 천둥도 한번 울려주신 것 같다. 꼭 저렇게까지, 싶었지만 본인은 팩트라고 믿거나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씀인지도. 누가 타인에게 그리 진심이겠나. 이후로 유튜브로 산 속에 사는 프로 <나는 자연인이다> 계열을 자주 본다. 한국 병원에서 내 침대 옆에 계시던 팔순 할머니가 캐치볼 던지듯 던지신 말씀도 생각났다. 내 병이 궁금해서 살살 캐신 후 하시는 말씀. 자궁암 걸린 사람이 유방암도 잘 걸린다더라. 그 말을 듣고 할머니와 나 사이에 있던 커튼을 철벽 치듯 쳐버렸다. 그렇게 긴 세월을 사시고 그게 하실 말씀인가.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모르시나.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지. 고운 을 건넬 심정이 아니어  후로 입을 닫았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은 힐더가드 어머니 덕분이다. 어머니내가 하고 있는 보조요법 치료비를 조건 없이 다 대어 주시기 때문. 가격도 안 물어보시고. 우리 집에서 삼시 세 끼 밥 해주고 청소와 장보기, 내가 잠들 때까지 밤마다 발마사지를 해주는 우리 언니의 노고야 말해 무엇하랴. 거기다 암환자 특유의 짜증까지 받아주니 우리 언니는 뮌헨에서 불사조로 재탄생한 셈이. 그런데 언니에게이런 것들 '당연'한 범주에 속한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엄밀히 따지면 독일에서 형제자매는 가족이 아닌. 성인이 되어 각자의 가정을 꾸린 후에는. 힐드가드 어머니도 요즘 '가족'이란 단어를 자주 언급하신다. 조부모 역시 가족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더더구나 새어머니는. 그런데도 나는 힐더가드 어머니가 우리 족 같다. 어머니도 나도 마음이 약해졌나. 한국에서 재수술을 어머니의 왓쯔앱을 받았다. 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어머니의 두려움이 서울에 있는 나에게로 전해졌다. 내 뭉클함도 도나우 물결 너머 어머니께 가닿았을 것이다. 지금 뮌헨은 오후 다섯 시 반을 지나고 있다. 항암은 계속될 것이고, 그래야 한다. 언니는 빅투알리엔 마켓에 문어를 사러 고, 나는 산책을 나간다.



5층 암센터 휴게실에서 바라본 전경(위). 병원 옆 건물인 자연요법센터는 걸어서 1분. 여기서 항암 후 열치료를 받는다(위 오른쪽/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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