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한국을 아신다고요?
내가 만난 물리 치료사들
눈 위의 수묵화들(위). 거의 녹은 눈들(아래).
한국을 안다는 사람이 요즘 왜 이렇게 많은지. 이곳 자연치유센터에 와서 벌써 세 명이나 만났다. 첫 림프 부종 마사지를 하러 내 방으로 올라왔던 프라우 카이저 Frau Kaise. 겨울 내내 눈을 보며 산다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40대 중반 여성으로 몸매도 키도 동양 여성처럼 아담했다. 목소리와 태도와 눈빛이 온화했는데 같은 여성인 내가 보기에도 좋은 엄마일 것 같았다. 지난 글에서도 말했듯이, 그녀는 위로 두 아들과 막내딸의 나이가 각각 열여섯, 열셋, 다섯 살인 세 아이의 엄마였다.
올해 열여섯인 첫째 아들이 무슨 연유에선지(깜빡하고 못 물어봄..) 한국을 좋아해서 내년 여름에 한국에 여행을 간다고 하자 갑자기 자기 남편도 한국에 관심이 많다며 아들과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나. 그녀의 둘째 아들과 우리 딸은 나이가 만 13, 12로 비슷했는데, 사춘기가 한창인 그녀의 큰 아들은 너무 힘든 때라 말도 못 붙이고, 사랑스러웠던 둘째 아들은 사춘기 문 앞에 서 있다고. 옛날에는 엄마랑 뽀뽀도 잘 했는데 이젠 누가 보는 밖에서는 손도 잡지 않는다나. 그래도 아직 집에서는 볼에 뽀뽀하는 건 허락한단다. 나도 비슷하다. 집에서는 딸과 자주 껴안고 얼굴에 뽀뽀도 한다. 밖에선 어림도 없다. 얼마나 까칠한지 팔짱도 못 끼고 손도 못 잡는다.
두 번째 림프 부종 마사지사 헤어 욘 Herr John에게서도 성이 배 씨인 한국 사람 이야기를 들었다. 영어식으로 존인 줄 알고 독일식 이름이 아닌가 봐요 물었더니 독일 이름이 맞단다. 발음이 존이 아니라 욘일 뿐. 이십 대 중반쯤으로 중키에 체격이 좋고 손이 두툼했다. 어깨를 시작으로 복부에 양손을 대고 마사지를 받았는데, 이런 게 마사지사 손이지 싶었다. 내 몸의 에너지가 그의 손 안에서 원을 그리며 도는 듯했다. 신기해서 이건 어떤 마사지냐 물었더니 치료용 마사지란다. 물리치료 전문학교에서 3년간 여러 종류의 테라피를 배웠는데 자기가 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기 존중감이 남달라 보였다. 그런데 학교에 자기보다 뛰어난 학생이 딱 한 명 있었단다. 한국인 남학생으로 정말 성실하고 부지런한 동창이었다며 엄지 척을 했다. 한국인의 성실함은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구나. 우리 슈퍼 동료들만 봐도 알지. 헤어 욘에게 개인 샵 명함을 받았다. 사보험 환자만 받는다기에 힐더가드 어머니를 위해서. 어머니의 손과 발 통증에 도움이 되려나 싶어서. (PS: 한국 동창이 선물한 인삼 엑기스를 마시고 인삼의 진가를 알게 된 헤어 욘 씨는 조만간 우리 한국 슈퍼에 인삼차를 사러 들르겠다고 약속했다.)
오늘 글의 주인공은 단연 프라우 포겔 Frau Vogel이다(Vogel은 독일어로 '새'라는 뜻이다). 20대 중반 여성으로 그녀는 족욕 테라피 담당이었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내가 들고 온 두꺼운 돈키호테 책이 어떤 언어인지 궁금해했다. 그 책이 한국어로 된 책이고, 내가 한국 사람임을 알자 갑자기 그녀가 커밍아웃을 하네. 자기가 김치를 직접 담가먹는다며.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신기해 죽겠다. 한국 슈퍼에서 일하다 보면 김치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랄 때가 많다. 남녀노소가 없다. 대부분 독일인과 뮌헨에 사는 외국인들인데, 그중 평범한 독일 아줌마 두 분이 와서 자기들도 김치를 만들어 먹는다고 해서 또 놀라고. 왜요 하고 물을 뻔했다. 왜냐고? 김치 안에 들어가는 마늘 냄새 때문에. 독일 사람들은 마늘 냄새를 싫어한다. 한국 음식을 잘 먹는 독일 사람인 우리 남편조차 마늘을 먹을 땐 지금도 조심한다. 독일에 사는 교포분들이 김치에 마늘을 안 넣거나 익혀서 넣는다는 말을 들은 게 20년 전이다. 그런데 마늘 넣은 김치를 먹는 독일 사람들을 보다니 격세지감이 느껴지지 않겠는가. 프라우 포겔과는 김치 얘기로 신나게 이야기꽃을 피우다 테라피가 끝났다. 마지막에는 신김치와 돼지고기 목살로 맛볼 수 있는 김치찌개와 김치전을 소개했더니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할아버지 물리 치료사인 헤어 알더 Herr Alder 씨는 다른 의미에서 한국을 생각나게 한 분이다. 작년과 달리 이번에는 다리 림프 마사지는 못 받았고, 통합 물리치료만 받았다. 잘 안 보이시길래 혹시나 그만두신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아직 계셨다. 예전에 퇴직을 하셨지만 물리 치료사로 연장 근무 중이신데 요즘은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4일만 근무하신다고. 칠순에 가까운 알더 씨의 치료를 받으면 몸도 마음도 금세 편안해진다. 알더 씨가 두 손을 내 어깨 밑으로 밀어놓고 가만히 계시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어깨와 등의 근육이 풀리는 느낌. 힘도 안 들이고 척추 옆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누르시기만 해도 부드러운 경락 마사지를 받는 기분. 전이된 가슴뼈 아랫쪽 등에 오랫동안 양손을 대고 있던 알더 씨가 내게 말했다. 프라우 오, 지금 당신 가슴뼈에 있는 암세포가 모래알처럼 점점 작아지고 부서져 내 손 위로 떨어져 내린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항상 기억하세요. 당신의 몸 안에 사는 물고기 병사들이 당신의 암세포를 하나하나 잡아먹는다는 것을요. 그 말에 눈을 감고 있던 내가 살며시 미소 짓자 알더 씨가 덧붙였다. 이건 실제로 있는 테라피랍니다. 네, 알아요. 얼마 전에 이 테라피를 제게 알려주신 한국의 한의사 분이 계시거든요(그분이 알려준 이미지는 더 센 고래였다!). 당신의 테라피는 한국 사람에서 마사지를 받는 것처럼 제겐 익숙하고 편하답니다. 온화한 할아버지 치료사가 마지막으로 나를 앉힌 후에 내 등을 두어 번 위에서 아래로 쓸어주며 말했다. 오,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말씀이군요..
물리 치료실을 나와 입원실로 올라가는 계단 복도 벽에 유방암에 대한 정보가 눈에 띄었다. 노젓기, 보트, 카누 등으로 해석되는 독일어 Paddeln이 유방암에 좋다는 포스터였다. 유방암 환자가 직접 노를 저으러 가긴 쉽지 않겠지만 집에서 노젓는 동작만 해도 좋겠다 싶었다. 팔 림프 부종에도 도움이 될 듯. 그렇다면 자궁암에는 양다리로 노 젓는 운동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있잖은가, 헬스장에 가면 두 다리를 뻗었다 당겼다 하는 근육 강화 운동 말이다. 내가 가는 작은 피트니스 센터는 우주 비행사들이 입을 법한 전기가 연결되는 조끼를 입고 트레이너의 동작을 따라하는 체인점이라 운동 기계가 없고, 또 그런 곳을 가더라도 가격이 비쌀 테니 나는 집에서 간편하게 자전거 타기로 대체할 생각이지만.
산책을 나가기 전 입원실 침대에 다리를 높인 채 누워 쉴 때 통유리를 통해 밖을 바라보니 창문 가득 나무들이 흑백 사진처럼 빽빽하다. 바람이라도 부는지 큰 나무들이 두 팔을 위로 치켜든 채 느리게 춤을 춘다. 제각각의 리듬으로. 절도 있는 군무 같은 것도 없이. 누구는 느리고 누구는 빠르고, 누구는 동작이 크고 누구는 작게. 그래도 어색하지 않더라. 바람의 노래에 장단이라도 맞추나 했더니 나중에 밖으로 나가보고 안 사실인데, 한가하게 몸을 흔들고 있던 게 아니고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던 거였다.
며칠 사이 눈이 많이 녹았다. 산책을 할 때마다 나뭇가지에 피어있던 눈꽃들은 사라지고 숲 속에 흰 양탄자처럼 남아 있다가 이젠 그마저도 없다. 눈길을 걸을 때마다 내 귀에 들려오던 나타샤와 백석의 시와 흰 당나귀도 없다. 눈을 뚫고 올라온 여린 가지들만 수묵화처럼 서 있을 뿐. 꽝꽝 얼었던 연못도 풀리려는지 얼음 아래로 물빛이 드러나고 그 위로 새들이 미끄러지듯 스케이트를 타는 풍경도 보았다. 쉼 없이 수다를 떠는 걸 보니 소녀 새나 처녀 새들이 틀림없다. 아니면 누가 저들처럼 한순간도 쉬지 않고 생기발랄할 수 있단 말인가. 새들이 놀라지 않게 눈길은 거두고 귀만 연못 쪽으로 열어두고 걸었다. 한 바퀴 걸어 다시 돌아오니 새들은 날아가고, 작별도 없이 떠난 자리엔 나뭇잎들만 뒹굴고 있었다.
산책길의 연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