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 사이로 산책하는 시간

재활이나 요양 때 챙겨야 할 필수품

by 뮌헨의 마리


눈길 산책 1



뮌헨의 자연치유센터(KfN)에 입원 요양을 와서 매일 오후 3시 산책을 간다. 그 시간이면 모든 일정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저녁 식사가 나오는 4시 반까지가 한가롭게 산책하기 좋은 시간이다. 사계절용으로 산 등산화가 눈길에도 적당한지 점검하기도 좋았다. 신어보니 괜찮다. 롱 패딩을 챙겨 입고 머플러와 장갑과 모자까지. 그 정도면 추울 리가 없다.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양손에 노르딕 워킹 스틱을 쥐고 산책하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이번에 스틱을 안 챙겨 왔다. 작년에 가지고 와봤는데 크게 쓸 일이 없었고, 산책로인 숲도 평지이기 때문이다.


올해 눈 구경은 이곳에 와서 원 없이 다 했다. 5일이 넘도록 나무고 길이고 숲 전체가 흰 눈꽃으로 덮였다. 일상을 벗어난 곳이라 길이 얼어붙는다 해서 큰 혼란도 없을 것이기에 고요히 감상하며 즐기기만 하면 됐다. 숲 속 벤치에는 한 뼘이나 눈이 쌓이고, 가지에 핀 눈꽃은 얼음꽃이 되었다. 눈을 이고 선 채로 눈꽃 트리가 된 나무들은 별다른 치장이 없어도 아름다웠다. 저 자연미! 독일에 온 지 만 5년. 돌아보니 나답게 못 살았다. 즐거운 일도 없었고, 지루하고 갑갑하고 답답한 적이 더 많았다. 지나치게 조용히 산 결과가 아닐까 싶다. 내년부터는 안 그럴 생각이다. 그럼 어떻게? 생긴 대로 살아야지. 난 뭘 그렇게 조심하며 살았을까. 조심할 게 뭐가 있다고.



눈길 산책 2



눈밭에 발이 푹푹 빠지는 숲을 걷고 돌아오면 방한모자 때문인지 머리 밑까지 촉촉해진다. 씻으려고 보니 샴푸도 바디 샴푸도 안 들고 왔네. 작년에는 다 챙겨 왔는데. 타월과 칫솔과 치약, 세안 도구와 스킨과 로션. 거기다 머리를 감고 나면 제멋대로인 컬 정돈 용 고데기까지 챙겼건만. 드라이기는 아이가 쓰도록 집에 두고 왔다. 머리숱이 예전 같지 않아 드라이기를 쓰지 않아도 한두 시간이 지나면 말랐다. 그렇다고 샴푸를 잊다니. 항암 때는 베이비 샴푸를 쓰라는 암센터의 조언대로 지금까지도 집에서 니베아 베이비 샴푸를 쓰고 있었는데.


욕실을 살피니 비누 한 장 없었다. 대체할 만한 건 젤 타입 핸드 클렌징. 안 되면 저거라도. 옛날에는 샴푸고 바디고 핸드용이 따로 있었나. 비누 하나로 머리도 감고 얼굴과 손과 몸도 씻었다. 병원 가까운 곳에는 마트도 편의점도 없다. 있어도 못 가고. 코로나 때문에 외출도 방문도 안 된다(내년 3월부터는 입원실 당 1명은 방문이 가능하다고. 면회 시간은 1시간. 코로나 테스트 필수). 샴푸 하나로 바쁜 남편을 오라 가라 하기도 그렇고. 다음날 써봤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서. 아침 식사는 7시 반. 시간은 충분했고, 샴푸 대용으로 나쁘지 않았다. 저자극에 아침을 먹는 동안 머리는 자연 건조. 고데기로 컬이 심한 부분만 펴주니 하루가 개운하고 산뜻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은 진리 맞구나.



눈길 산책 3



독일 사람들은 입원할 때 목욕 가운을 꼭 챙긴다. 심지어 테라피 받으러 물리 치료실로 오면서도 입고 온다. (그러라고 있는 건가?) 난 작년에 카타리나 어머니께 하나 빌려왔었는데 크게 입을 일이 없어서 올해는 패스했다. 부피가 서 짐만 되는 목욕 가운보다는 가벼운 롱 카디건을 챙겨 올 걸 그랬다. 입고 벗기 편하고 물리 치료실 갈 때도 간편하게 걸치기 좋았을 텐데. 산책용 등산화 말고도 실내화와 피트니스용 운동화는 필수다. 다음에는 자명종 시계도 챙겨 올 생각이다. 알람은 핸드폰으로 한다 쳐도 창가 쪽에 눈에 쏙 들어오는 시계가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아니면 라디오도 괜찮다. 시계 대용도 되고, 하루 종일 클래식 음악을 들어도 좋겠다.


샴푸만큼 아쉬운 건 빗과 손톱깎기다. 작은 휴대용 빗이 있었는데 까먹었다. 손톱은 오기 전날 깎았는데, 왼손만 깎고 오른손은 안 깎았다(아, 진짜..). 젓가락도 그렇다. 사과 잘라먹으려고 칼은 들고 와놓고, 쌈무와 민들레 장아찌 먹을 데 쓸 젓가락은 왜 잊냐고. 이게 다 짐을 미리미리 안 싸놓은 탓이다. 전날 밤 급히 싸다 보니 허술했다. 없다고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 슈퍼에서 일하면서 컵라면과 햇반 하나 안 챙긴 이 정신머리도 아쉽다. 없어서 다행인가 싶기도. 쌈장만 들고 오고 고추장은? 쌈장을 가져오니 고추장이 생각나고. 지나보니 먹을 일은 별로 없었지만. 과일도 그렇다. 바나나, 사과, 귤을 챙겨 오자 집에 두고 온 감이 생각나더라고. 정도면 정신 문제로 보인다. (PS. 아침에 뮤슬리를 먹다가 또 생각난 건데, 호두나 아몬드 등 견과류를 챙겨 왔더라면 좋았겠다.)



눈길 산책 4



아침부터 잠자기 전까지는 츄리닝 하나면 충분했다. 환자복을 따로 주지 않는 게 이곳의 특징. 물론 병원에서 수술하고 입원했을 때는 환자복을 입었다. 추워서 환자복 위에 스웨터나 츄리닝을 걸치기도 했지만. 여기는 요양차 입원하는 곳이라 그런가. 환자복이 없고 각자 편한 복장으로 지낸다. 작년 경험을 되살려 올해는 최대한 간단하게 준비했다. 삶이라는 여행에는 필요한 걸 챙기는 기술보다 필요 없는 걸 빼는 기술이 더 필요하더라고. 병원에 올 때도 마찬가지. 책, 라디오, 텀블러. 세 종류 신발. 속옷과 츄리닝 한 벌, 편안한 잠옷. 세면도구와 스킨과 로션. 내 경우 휴대용 고데기처럼 있으면 기분이 업되고, 없으면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품목이 있다면 필수품으로 면 되겠다. 나머지는 적당히 견디기.


5일간의 비타민 C 고용량 요법을 끝내고 남은 5일 동안 고주파 열치료에 들어간다. 비타민 C 요법은 간단하다. 정맥 주사로 비타민 C를 맞음. 링거 맞는 것처럼. 닷새 동안 정맥 주사기를 팔에 꽂고 있는 게 불편할 뿐. 주사기를 빼니 날아갈 듯했다. 머리 감을 때도 여간 거북한 게 아니었기에. 고주파 열치료는 세 번은 부분 치료, 두 번은 전신 치료다. 부분 치료는 둥근 원판을 전이된 가슴뼈 위에 고정하고 피부 속으로 열이 스며들게 한다. 전신 치료는 침대 위에 사각 텐트를 설치하고 그 속에 들어간다. 머리 부분에는 차단막이 있어 뜨겁지 않다. 전신 열치료는 체온을 높이고 면역 효과가 좋은 만큼 비용도 비싸다(이런 걸 공짜로 두 번이나 받다니!). 첫날 맥박을 재던 의사가 내 기력이 약하다며 몇 가지 처방을 했다. 에너지를 올려 준다는 물약을 매 끼마다 마시고 있다. 덕분인지 이른 저녁을 먹은 후 무거운 줄도 모르고 700페이지가 넘은 돈키호테 책을 두 손으로 번쩍 들고 읽고 있다. 돈키호테를 읽다 보니 자꾸 이상한 상상도 한다. 예를 들어 계속 이렇게 치료받는다 치고, 집에 갈 때까지 저 눈이 녹지 않고 버텨준다 치고, 창과 방패와 말라깽이 말만 있어 준다면 투구 대신 놋쇠 그릇을 뒤집어쓰고라고 저 눈 속을 만주 벌판처럼 달려볼 텐데. 지금 우리 돈키호테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풍차 대전과 죄 없는 양 떼들과의 대전을 거쳐 이발사의 소중한 놋대야와 한 판을 치르는 중이다.



눈길 산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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