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요.
조건도 없고 따지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치대고, 더 놀다 가라고 발목을 붙들고, 혹시라도 갈까 봐 신발을 숨기고, 마지막 순간까지 뽀뽀를 퍼부으며 시간을 끌다가, 가고 나면 금세 시무룩해지는 것.
그리운 샘.
알리시아를 미술 특강에 데려다 놓고 가까운 카페로 왔어요. 이번 주는 방학이 끝나는 마지막 주랍니다. 방학 기간 중에 어디든 한 번 보내볼까 하고 알아보니 자리가 없어서 방학 내내 책만 보며 5주를 기다렸어요.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사흘 동안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종일반이에요.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색색의 두꺼운 유리를 직접 망치로 깨고 원하는 모양을 붙여 작품을 만드는 모자이크 수업이랍니다. 어제 처음 가봤는데 알리시아가 만족해하더군요.
어제는 아침부터 세찬 비가 내렸습니다. 카페 안에 있는데도 어찌나 추운지 카페에서 글을 쓰다가 집으로 돌아가 두꺼운 카디건을 꺼내 입고 왔더니 글쎄 오후에는 비가 그치는 거예요. 여기 날씨가 이래요. 종잡을 수가 없답니다. 그래도 좋았어요. 한 번 화났다고 며칠을 말도 안 하고 지내면 괴롭잖아요. 날씨도 그런 것 같아요. 흐리고 비 온다고 몇 날 며칠을 찌푸리고 있으면 되나요. 언제 모진 바람 불었냐 싶게, 언제 비가 쏟아진 적이 있었나 어리둥절 하도록 금방 하늘이 맑아지고 푸르러 주면 고맙지요.
오늘은 아침부터 9월의 첫가을답게 햇살이 제 몫을 다해 주었답니다. 알리시아에게 엄마는 오전에 집으로 돌아가서 집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해놓고 오후에 데리러 오겠노라 해놓고는 어제 들렀던 베이커리 카페로 와서 종일을 이렇게 앉아 있어요. 너무 좋아서요.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네요. 아침에는 카푸치노에 크라상 하나, 점심 때는 라떼에 빵 하나 주문해서 문을 활짝 열어놓은 바깥 풍경이 지루하게 않게 이쪽저쪽 자리까지 바꿔가면서요. 눈치를 주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저 혼자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내일이 지나면 여기 올 일도 없겠다 싶어 계속 앉아 있기로 했답니다.
카페의 빨간 테이블 위에는 셰익스피어를 펼쳐놓고 겨우 <오셀로> 1막만 떼고 더 이상 진도도 못 나갔어요. 큰길에서 오가는 차소리,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카페 앞에 색색의 다양한 자전거가 멈추었다 다시 어딘가로 출발하는 모습, 그런 별 거 아닌 것들에 자꾸 시선을 빼앗겨 정작 오셀로는 뒷전이었어요. 큰 가로수의 그림자가 오른편에서 가운데로 움직이다가 점점 왼편으로 옮겨가는 것도 놓치지 않고 지켜봤지요. 그러는 사이사이 카페 안에는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 내리는 소리, 구수한 빵 냄새, 손님을 응대하는 직원들의 귀에 익은 독일어가 쉼 없이 들려오고요. 전혀 소란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런 고요한 소란에 몸도 마음도 편안해졌답니다.
카페 앞에 수도 없이 지나가는 자전거를 보니 갑자기 생각나네요. 어제는 알리시아와 고모 바바라가 1주일 동안 고심하던 자전거를 사기로 한 날이었어요. 그런데 고모가 결정을 못하네요. 그 많은 자전거 가게에도 들르고 인터넷으로도 찾아보고 했는데도요. 제 생각엔 조카가 좋아하는 걸로 사주면 간단할 텐데 고모 마음은 또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에요. 알리시아와 함께 와보라고 해서 어제 고모 사무실에 들렀더니 이번엔 헬맷을 열심히 검색하고 있더군요. 이제는 내가 나설 차례구나 싶어서 헬맷부터 사자고 말하며 셋이서 시내로 나왔지요. 고모 사무실 방문 이후 3시간 만에 겨우 헬멧 고르기에 성공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답니다. 헬맷요? 제가 재빨리 계산해 버렸어요. 그러다 헬맷도 다른 날로 미뤄질까 봐서요. 그래도 조카 자전거 하나 사주겠다고 1주일도 넘게 아이와 자전거 가게를 돌아다니는 고모가 고마웠어요. 뮌헨에 자전거 가게가 오죽 많나요. 선택이 어려운 것도 이해는 갑니다.
예전 같으면 그런 마음을 고마운 줄도 모르고 왜 저럴까, 왜 빨리 결정을 못 하는지 답답해하기도 했을 텐데, 어제는 고모의 손을 잡고 장난치며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우리 알리시아가 참 복이 많구나 싶었어요. 뮌헨에 고모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요. 한국에서 이모를 사랑했듯이 뮌헨의 고모를 사랑하는 알리시아를 보며 생각합니다. 사랑의 모습이 저러하지 않을까요. 조건도 없고 따지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치대고, 더 놀다 가라고 발목을 붙들고, 혹시라도 갈라 치면 신발을 숨기고, 마지막 순간까지 뽀뽀를 퍼부으며 시간을 끌고, 가고 나면 금세 시무룩해지는 것. 요즘 들어 고모의 눈이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는지, 얼굴에는 늘 핑크빛 홍조로 가득하고요. 이런 게 다 사랑이 시킨 일이 아니고 뭐겠어요.
드디어 도착한 마리엔플라츠의 대형 스포츠 가게. 남녀 직원 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썼다 벗었다, 조였다 풀었다, 난리 친 헬맷만 도대체 몇 개인지. 물건 하나 고르는데 참 요란하고 힘들구나 싶다가도 고모의 그 정성과 시간을 생각하면 저녁은 제가 사야겠다 싶더라고요. 헬맷도 샀겠다, 거기다 열흘 동안 왔다 갔다 내릴 비도 다 내려 며칠 동안 날씨도 화창하겠다, 자전거를 고르는 일만 남은 것 같네요. 더 걸을 힘도 없이 지칠 대로 지친 엄마와 고모와 아이 셋이 나란히 손을 잡고 독일의 서민적인 백화점 카우프호프 Kaufhof 5층인가 6층 식당가에 들러 아이가 좋아하는 치킨 윙을 냠냠 맛있게도 먹었답니다. 요즘 엄마가 고모를 만날 때마다 고마워, 고마워, 하는 소리를 알리시아도 들었을까요.
p.s.
미술 특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바바라의 긴 메시지가 들어와 있네요. 오늘 점심때 자전거를 사서 회사 앞에 얌전히 세워 두었답니다. 내일 미술 마치면 회사로 와서 시승식을 할까 묻네요. 당연하지, 고마워!!! 번개처럼 답장을 보냈죠. 정말 '우리 고모 만세, 만만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