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가져가야 하고 저것도 가져가야 하고, 그런데 이걸 어떻게 담아가야 하나. 한 달을 비우려면 냉장고도 비워야 하는데.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맥시멀 리스트다. 쟁여놓는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용하고 들어가는 물건/품목의 숫자가 남들보다 좀 많다. 접시도 바꿔가면서 쓰고 옷이나 신발도 같은 걸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신은 적이 없다.(아프거나 정말 아프거나... 정말 매우 아플 때 제외)
몇 년 전 좋아하는 영화감독 변영주의 인터뷰에서 "내 삶은 캐리어 하나에 정리될 정도면 충분하다. 이젠 좀 성공했으니 캐리어 두 개?"라고 했던 말을 좋아했다. 공기처럼 가볍고 단순한 삶. 그런데 나라는 사람은 매우 복잡하고 어딘가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깊게 파고드는 성향인데. 이번 한 달도 캐리어 하나는 힘들 것 같고. 뭘 더 가져가야 하지?
리스트를 짰다.
우선 가득 찬 냉장고를 비우기 위해서 이걸 어떻게 할까, 이 고민을 했다. 왜 난 또 이렇게 나물을 잔뜩 산 걸까, 이제 곧 나물의 천국 영월로 가게 될 텐데 하면서 박스채 쌓인 나물들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지인들 사이에서 1인가구인지 의심받던 냉장고
퇴근하고 오면 우선 냉장고의 나물을 갈아 페스토를 만들었고, 또 이걸 어떻게 영월까지 가져갈지를 고민했다. 영월에 가서도 예쁜 그릇에 먹고 싶다는 욕망이 내 피곤함을 이겼기 때문에 대충 먹을 식단에 맞는 그릇과 조리 도구를 챙겼다. 에어프라이어, 커피 드리퍼에 각종 소스(카레, 올리브, 페스토 3종.. 등등)를 쌌고, 내가 한달살이를 한다는 걸 안 지인은 캠핑용 소스 소분 통을 선물로 주었다.
곰취 페스토. 명이, 곰취, 어수리 다 해봤는데 곰취가 제일 맛있었다
최대한 비운 영월 오기 직전 냉장고
선물받은 소스통
영월에는 백화점은커녕 올리브영도 없다. 내 영혼의 안식처이자 참새방앗간이 없다. 쓱배송도 안되고 컬리도 새벽 배송이 아니라 택배 배송이라서 지금처럼 바로바로 받지는 못한다. 거기다가 펜션에서 택배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내가 자주 먹는 파스타 건면, 크래커, 유제품들을 리스트를 짜서 가기 전날 주문해 가져 가기로 했다.
영월에는 대신 장을 써야 한다. 앞서 말한 백화점이나 올리브영도 없고 심심할 때마다 걸으러 가는 대형 쇼핑몰도 없다. 이웃 제천이나 원주에 있지만 차가 없으니 그건 너무 큰 일. 그래서 시장에서 장을 봐야 한다. 왠지 장에서는 장바구니를 쓰는 게 더 예쁠 것 같아서 새로 매쉬백도 장만했고 - 에코백은 깨끗하게 세척된 도시 백화점 식품관 감성이라 뭔가 흙이 빠질 수 있는, 그런 매쉬백을 써야 할 것 같았다. 모든 내 소비는 합리적 이유를 따른다.
가져온 메쉬백
또 어떤 지인은 리틀 포레스트 감성에 맞는 새파란 리넨 에이프런을 선물해줬다. 이게 꼭 필요하냐?라고 물으면 대답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걸 가져가야만 했고, 쓰지 않더라도 우선 가져가 보자 라는 마음이었다.
옷과 화장품은 말해서 무얼 하리. 5월이니까 덥겠지, 하는 마음과 그래도 강원 도니까 추울 거야 하는 마음에 내가 좋아하는 긴팔+반바지 조합을 원 없이 입을 수 있겠다면서 긴팔과 반바지, 그리고 ㄴㅏ는 어딜 가도 요기니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요가 매트와 타올 '몇 장', 요가를 하고 명상도 해야 하니 인센스도 '몇 종류'.. 명상을 하면 책도 읽고 싶겠지? 하며 책도 몇 권..
이런 식으로 싸다 보니 결국 내 짐은 28리터 캐리어 하나, 코스트코 가방 하나, 이케아 파란 장바구니 하나, 메쉬백 두 개에 에코백 두 개가 되었다.
집에서 가져온 것들. 결국 밥솥도 이후에 바꿨다
내려오고 나서 일주일 만에 서울에 사흘 다시 올라가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한 일도 가져와서 안 쓴 것들과 바꾸고 싶은 것들을 다시 바리바리 싸서 서울의 다른 물건들과 '교체'하는 것이었고, 펜션의 밥솥은 쿠ㅊ인데 나는 쿠ㅋ 압력밥솥 밥맛을 더 좋아해서 밥솥까지 싸왔다.
지난주 집에 올라가서 더 가져온 것들
이렇게 짐을 싸는 걸 보고 '도대체 그게 왜 다 필요한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내 삶의 대부분의 많은 것들이 먹고, 자고, 입고, 쓰는 모든 것들- 내 취향을 담길 바랐다.
왜?라고 묻는다면 사실 할 말은 없다. 그렇게 따진다면 왜 여기 강원도까지 오는 건데?라고 할 때 할 말은 없지 않나.
(+) 중간에 서울 집에 갔을 때 텅 빈 집을 보면서 생각보다 조금 쾌적했다. 냉장고도 빈 걸 보니까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실 이렇게 이고 지고 쟁이지만 조금 줄일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기회에 정말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