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빼미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자는 본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모두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모두 붉은 피가 나오므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인조 23년 6월 27일-
영화는 이 기록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세자는 소현세자를 말한다. 소현세자는 누구인가? 올빼미를 볼 때 떠올리면 도움이 되는 역사적 사실들이 있다.
1616년, 조선이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여진족이 후금이라는 신흥 강국을 세웠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와 새로운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 정책을 펼친다. 이는 실리를 위한 것이었으나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을 따르는 대신들은 불만이 많았다. 결국 광해군이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로 유배 보내 죽게 하자 이를 빌미로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펼치는데 이에 분노한 후금은 조선을 침략해와(정묘호란) 형제의 관계를 맺길 요구했고, 인조는 화약을 맺는다.
9년 뒤 명을 밀어붙여 세력이 더 커진 후금은 청으로 이름을 바꾸고 또다시 조선을 침략해와(병자호란) 군신관계를 맺자고 요구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쳐 45일 동안 항전했지만 결국 삼전도에서 큰절을 3번 하고 이마를 9번 땅에 찧으며 굴욕적으로 항복한다. 이렇게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됐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20만 명의 백성들이 청에 인질로 잡혀간다.
청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8년 후 돌아오는 시점이 바로 영화의 배경이다.
새로운 침술사를 뽑던 어의(최무성)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맹인 경수(류준열)가 궁으로 들어간다. 아픈 동생의 약값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놓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경수에게 궁궐은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해야 하는 곳이라고 알려준다.
그런 경수에게는 비밀이 있는데, 낮에는 봉사이지만 불빛이 없는 어두운 곳에서는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올빼미로 지어진 이유이다. 경수는 밤에 사람들 몰래 내의원의 약들을 익히고 동생에게 편지도 쓴다.
한편, 인조는 소현세자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아들이 청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소문이 들려왔기에 불안했다. 아마 본인이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되었기에 주변 사람들을 믿을 수 없었고, 굴욕적으로 항복한 청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하지 않았을까. 인조는 신하들의 항의로 세자를 겨우 마중 나온다.
소현세자는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조선이 살 수 있다고 아버지에게 말한다. 그러나 인조는 오히려 화를 낸다. 귀인 조 씨는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 이런 인조의 불안감을 더욱 부채질한다.
경수는 몸이 약한 소현세자의 침을 놓다가 자신이 밤에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만다.
왜 볼 수 있는데 못 본 척하느냐?
소인같이 천한 것들은 봐도 못 본 척해야 살아남습니다. 때로는 눈 감고 사는 게 편할 때도 있습니다.
소현세자는 그런 경수에게 확대경을 선물하며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경수는 소현세자의 따뜻한 배려심에 감동한다.
밤에 소현세자가 아파서 급히 어의와 경수가 호출된다. 세자의 열을 내리기 위해 경수는 어의가 시킨 대로 명주천에 물을 묻혀 열심히 건네준다. 그런데 세자의 몸을 닦고 다시 건네받은 명주천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은 경수. 어의의 침을 맞고 있는 세자에게서 이상한 신음 소리가 들린다.
순간 촛불이 꺼지자, 시력이 돌아온 경수는 눈앞의 진실에 충격을 받는데....
올빼미는 실록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 몇 줄 사이에 비어있는 이야기를 상상해서 채운 영화다. 딱 내가 좋아하고 쓰고 싶은 타입의 스토리이다. 어렸을 적 그토록 좋아하던 대장금이 역사적 기록 한 줄 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기 때문일까? 나도 이렇게 비어있는 공간을 상상력으로 가득 메꾼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배우들의 연기력도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류준열의 맹인 연기를 보니 왜 유해진이 류준열에게 기둥이 되고 있다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맹인 연기 뿐만 아니라 맹인인 척 연기하는 연기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관객들이 덩달아 조마조마해지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연기를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류준열 배우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마다 인물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배우 중 한 명인 것 같다.
그리고 유해진도 남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위치에 오른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떨리는 안면근육 연기에 감탄하며 이래서 천만배우구나 싶었다. '왕의 남자'에서 광대로 궐 바닥에 납작 엎드렸던 촬영장에서 이제는 왕이 되어 아래를 내려다보며 기분이 이상했다는 유해진 배우의 인터뷰를 들으니 유해진 배우가 실력을 그만큼 인정받는 것 같아서 나도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최무성 배우는 선한 역할과 악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배우였고, 소현세자와 원손의 연기도 인상적이어서 감독이 캐스팅에 정말 공을 들였다고 느껴졌다.
진실을 마주하면 눈을 감아버리지 말고 오히려 눈을 더 크게 떠라
우리 사회에서도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 싶다. 불의를 마주하고도 괜히 나섰다가 나에게 피해가 올까 봐 넘어가야지 하는 마음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는 것 같다.
최근 영화관에서 본 한국 영화 중에 가장 잘 봤다고 생각하는 영화, 올빼미. 맹인의 감각을 극대화시킬 사운드가 중요한 영화이니만큼 꼭 영화관에서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