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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리 Feb 14. 2022

나의 집은 어디인가.   

정착하지 못하는 자의 잠 못 이루는 밤에 대하여  

전세 만기 도래. 부동산 전화를 받고 얼떨결에 나가겠다고 해버렸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귀찮은데 연장한다고 할걸 그랬나? 후회가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다. 2년에 한 번씩 옮겨 다니는 전세 인간은 이미 떠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다.


지도를 펴놓고 앉아 고민을 시작한다. 직업도 없는 마당에 수도권에서 살 필요가 있을까.


희망 가격 수준을 맞춰 놓고 네이버 부동산 매물을 뒤진다. 짐을 싸는 김에 해외로 나가 보는 것은 어떨까. 바로 이 시국에. 별놈의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저으며 나는 불면에 시달렸다.


그 사이에 부동산 사장님이 낯선 손님과 집을 보러 왔고, 계약하기로 했다는 문자가 왔다. 이제는 정말 집을 비워줘야 한다. 가슴이 떨렸다. 나는 아직 이사 갈 집을 구하지 못했다.


비상이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발을 동동 굴렀지만, 막상 다시 지도를 펴 놓고 앉아서는 이 쪽으로 가면 ㅇㅇ산이 있으니 매일 등산 다니기 좋겠고, 이 쪽으로 가면 바다가 가까이 있지. 해산물이 맛있을 테지. 여긴 ㅇㅇ가 유명하던가 라며 신선놀음을 한다. 책상에 앉아 전국 8도를 여행하며 내가 애청하는 '한국인의 밥상'과 '영상앨범 산'을 찍고 앉아있네.


흠, 이럴 바에는 시골로 이주를 하여 텃밭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아 보는 것이 어떨까. 어차피 백수의 삶은 어느 시점이든 빈곤에 내몰리게 될 확률이 크다. 결국은 먹고 사는 문제다. 먹을 것이 있으면 된다.


귀농을 할까 귀어를 할까. 차라리 아무도 안 사는 임야를 사서 산의 시간을 캐는 심마니가 될까. 나 같이 키보드만 두드리던 인간이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중년 백수 싱글로 지금과는 뭔가 완전히 다른 삻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고, 외로움과 불안함이라는 대가를 치뤘으나 얻은 것은 고작 불면증 뿐이었다.


더 이상 이 문제는 어디에 살 것인가 정도의 고민으로 끝나지 않을 듯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본질적인 질문에 도달했을 때쯤 일주일을 불면에 시달린 나는, 지도를 어찌나 열심히 봤는지 오른쪽 눈의 실핏줄이 터져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머리가 아팠다.


실제로 여러 지역의 매물을 보러 다니다 보니 내가 과연 수도권을 벗어날  있는 인간 인가 하는 고민에 빠졌다. 사람들은 연고지도 없이 낯선 곳에 가서  생각을 하는 내가 무모하다고 했다. 어차피 오피스텔 이웃들과는 인사 한번 나눈 적이 없었는데 어디 살든 무슨 상관이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겁이 났다.


이렇게 해서 다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무난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저 이 타이밍에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옵션을 선택했다.


새로 살게 되는 집은 거실의 넓은 창 너머로 멀리 바다가 보인다. 횟집이 많이 보였다.


이삿짐을 싼다. 생각보다 짐이 많다. 수납이 좋은 집의 함정이다. 겉으로는 꽤나 미니멀리즘을 이룬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온갖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지나간 시간을 먼지로 뒤집어쓰고 쓸모를 잃은 채 '수납' 되어 있을 뿐이다. 이번에도 아끼다 똥 되었다.


이삿날이 되었다. 아침 6시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도와준 식구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마침내 새로운 곳에서 혼자가 되었을 때, 나는 아직 풀지 못한 상자들에 둘러 싸인 채 캔 맥주를 땄다. 역시 차가운 맥주의 첫 모금이란.....


아, 이제 한시름 놨고..... 또 이사는 못할 것 같은데. 이제 정말 정착해야 될 때가 온 건가.


맥주가 한 모금 들어가니 생각이 달라진다. 100세 인생. 80에 정착해도 20년은 한 곳에 살아야 하는데, 지금 이렇게 내 두발로 온전히 땅을 디딜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멀리 돌아다녀도 되지 않을까.


정착의 길은 멀다. 일단 맥주를 다 마시고 생각해 보기로 한다.





Photo by CHUTTERSNAP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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