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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시미즈 아파트의 새로운 이웃 코타로가 있다.
유치원 정도는 혼자 다닐 수 있다고 말하는 귀여운 독거 소년 코타로는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다섯 짤 소년이다. 혼자 모든 것을 어른처럼 척척 해내야만 집 나간 엄마와 아빠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어린이.
어, 이거 약간 느낌 오는데. 일본 드라마 좀 본 사람들은 다 아는 마루모의 규칙(2011) 같은 거 아니야, 이거? 부모 대신 제3의 어른이 아이들을 돌보는 이야기. 라고 얘기 해 놓고, 시간도 많은 김에 마루모의 규칙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
어린이와 강아지의 조합은 참을 수 없고, 나는 이미 울고 있다. 약 6개월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 낸 듯 진이 빠졌지만, 이번엔 다른 이유들이 추가되었다. 우리 아찌 생각이 나서.... 슈나우저와 소통 좀 해본 애견인들은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베프를 잃고 우는 그의 슬픔이 가슴을 쳐서.... 친구나 동료를 먼저 보내는 일도 드물지 않게 생기는 나이가 되었다.
다시 코타로에게 돌아가 보자. 나는 코타로가 귀여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극 중의 TV 애니메이션 '토노 사마 맨'의 사극 말투를 쓰며 앞가림 못하는 이웃들에게 한수 가르치는 코타로.
우므!!, 그러하오.
만약 나에게도 이런 독립적인 어린이 이웃이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땐 시미즈 아파트의 이웃들이 좋은 본보기가 될 듯하다.
그들처럼 나도 이제 이웃의 사건에 참견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나이가 되었고, 너는 나의 도움이 필요한 듯 보인다. 그러나 나는 기다릴 것이다. 어설프게 나서 구세주 놀이를 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너의 주변을 기웃 거리며 혹시나 내가 출동할 일이 있을지 기다려 볼 것이다. 너와 나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관계라는 것이 그렇다. 일방적으로 무언가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해서는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다. 우리는 주고 받는다. 코타로는 가장 약한 존재인듯 보이지만, 어른들의 심경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채고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사람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질문은 나이가 들 수록 어려워진다. 나에게도 그렇다. 누구나 자기 일은 자기가 하고 싶어 하고, 그게 어른이 된다는 거니까.
'친절한 타인의 기부'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코타로는, 일주일에 한 번씩 기부금을 전달하러 오는 담당자를 열렬히 환영한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폭죽을 터뜨리고 우유를 대접하고 노래를 부른다. 접대 선물을 잊지 않는다. 담당자를 친절하게 대하면 그 마음이 기부하는 타인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2004)가 떠오른다.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이 밀려와 깊은 슬픔에 빠져 버리게 하는 영화다. 나는 연이어 이 영화도 다시 보았다. 백수의 미친 여유다. 자신들의 삶을 유지 하기에도 벅찬 이웃의 어른들은 바로 눈앞에서 몇 년에 걸쳐 중첩되는 이 아이들의 비극을 눈치 채지 못한다.
시미즈 아파트에서 어설프지만 친절한 이웃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코타로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가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미래는... 물론, 가족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무책임에 방치된 아이들의 미래도...
시즌의 최종화에서 코타로와 유치원 반 아이들이 학예회에서 부르는 노래가 가슴에 맺힌다.
-우리들은 모두 살아 있어요. 살아있기 때문에 노래 부를 수 있어요.
-우리들은 모두 살아 있어요. 살아있기 때문에 슬픔을 느껴요.
나는 상점이 즐비하고 고층 아파트가 늘어선 전형적인 계획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넘쳐 흐르고, 삐까번쩍한 홀리데이 네온사인이 가득 찬 이 도시. 화려한 전구 옷을 입은 건물들이 밤을 잊은 채 빛나고 있지만, 여기도 저마다의 사정을 지닌 외로운 사람들이 있다.
늙은이의 오지랖이라고 해도 좋아. 촌스럽다고 해도 좋아. 뭐 그렇게 대단한 책임감이나 이타심 같은건 원래 없었어. 나는 그저 내 이웃의 안부를 걱정하며 토노 사마 맨처럼, 내 나름의 "강하고 훌륭하고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야. 우리는 결국 낯선 이의 친절에 기대어 살고 있으니까.
벗어날 수 없는 팬데믹의 시대, 그리고 어김없이 돌아온 연말. 나는 오늘도 소소하게 내 이웃의 안부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