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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리 Jan 31. 2023

내 친구 광민이에게

광민아, 안녕! 


잘 지내고 있니? 


너를 처음 만난 건 대한민국에 아직 '국민학교'가 있을 때였어. 우린 6학년이었지. 그때 너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나. 햇빛에 반짝이던 연회색빛의 머리카락. 얇은데 숱도 많아서 바람이 불면 샤르륵 하고 정렬을 맞춰 움직이던 너의 머릿결을.. 굵은 흑발을 가진 나는 네가 정말 부러웠었어. 머리카락만 보면 나는 깡촌 시골 산자락을 하릴없이 쏘다니는 천둥벌거숭이 소년, 너는 서울에서 전학 온 세련된 소녀 같았지. 하지만 실제론 너는 겁도 많고 말은 더 많은 말썽꾸러기였고, 나는 어엿한 반장이었다는 것을 새삼 언급하고 지나가마.  


중학생이 되어서도 우리 분식점에서 가끔 만났었잖아. 남자 셋 여자 셋. 우리 여섯이 초등학교 때부터 엄청 친하게 지냈지? 솔직히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는 기억도 안 나지만, 그때 참 재미있었어. 또, 고등학교 때에는 우리 여섯 명이 모여서 6학년 담임 선생님을 만나러 집까지 찾아갔었잖아. 근데 우리 왜 그랬어? 선생님도 적잖이 당황하셨지.


사실 그때 내가 충격받은 게 뭔 줄 알아? 네가 고등학교를 자퇴했다는 얘기를 듣고. 한 동안 춤을 춘다고 돌아다니더니 머리를 샛노랗게 염색한 너를 만나고는 꽤나 놀랐지. 난 너를 여전히 동네 형들에게 맞을 것 같다고 줄행랑을 치던, 얼굴이 뽀얗고 머릿결이 좋았던 남자애로만 알고 있었는데, 네가 그렇게 무언가에 열정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거기다 그렇게 소위 말하는 "좀 놀 줄 아는 애"가 되었다니. 솔직히 좀 멋있더라. 


너도 그때 날 보고 놀랐을 수도 있어. 나도 서양 문물에 한창 빠져 있었으니까. 하루에 KFC 징거 버거 3개에, 던킨 도너츠를 후식으로 때려야 식성이 차던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리곤 연락이 없었지? 입시생의 삶이 그렇지 뭐. 나는 피아노를 그만두고 다시 입시를 준비하게 되니 더 정신이 없었고.... 또 뭐 그렇게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거기에 물들어 버렸지. 그리고 어느 날인가 갑자기 너희들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다며 까까머리를 하고 학교 앞으로 불쑥 찾아왔던 것이 기억나. 삐삐 쳤었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날 학교 앞 골목 실비집에서 소주를 참 많이 마셨다. 뭐, 몰려다니던 녀석들 다 군대 가고 너만 남았었지만.. 녀석들 또 휴가 나왔다고 학교까지 같이 찾아와 주니까, 난 고맙더라. 


그때 술 취한 네가 중졸이라 군대도 못 간다고 막 서러워하고. 너 그러다 다른 애들한테 맞을 뻔했잖아. 


그리곤 네가 결혼하게 되었다고 했어. 5년을 사귄 여자친구랑. 우린 그때 스물한 살이었는데 말이야. 난 이제 남자 좀 만나보겠다고 '캠브릿지', 이런 흔한 이름의 호프집에서 단체 미팅이나 하고 앉았는데, 너는 결혼을 한다니.... 나는 여전히 세상천지 구분 못하는 천둥벌거숭이고, 너는 이미 어른이었지. 


네가 결혼 선물로 전기밥솥을 사 달라고 했었잖아. 난 입고 갈 정장 같은 것도 없어서 엄마한테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전기밥솥을 사 들고 결혼식장으로 향했었지. 그날은 눈이 왔었어. 그리고 네가 신랑입장에서 꽃마차 같은 것을 타고 공중에서 내려오는 것을 구경했지. 입이 쩍 벌어지더라. 초현실적이었어. 


근데 그날 왠지 눈물이 나더라. 난 정말 맹세코 너를 이성으로 좋아하거나 한적은 단 한 번도, 아니 단 1초도 없어. (믿어줘. 너 정말 내 스타일 아니야) 그냥 네가 무언가 이제 우리와 다른 배를 타고 긴 여행을 떠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 


그리곤 네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애새끼가 나 만큼 꼴통인 것 같다"라고 자랑반 한숨반이 섞인 너의 전화도 받고, 또 "네 회사 게임에 내가 얼마를 쓰고 있는지 아느냐"라고 나한테 갑질하는 너의 항의도 계속 받고..... 같이 술 한잔 하면서 인생 넋두리도 했던 것 같고. 


그리고는 또 몇 년 연락을 못했던 것 같다. 다들 결혼하고 애를 낳고... 사는 게 바쁘니까. 작년에 네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우리가 연락이 뜸했다는 걸 알아차렸을 정도였어. 


코로나도 좀 괜찮아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병원에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달을 못 넘기고 네가 하늘나라로 가버렸네.... 


우리 아직 마흔 다섯 밖에 안되었는데... 넌 왜 모든 걸 그렇게 앞서 가버려. 


장례식장에서 우린 6학년 때처럼 모여 앉아서 네 얘기를 했다. 우리는 웃기도 하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려 가가기도 하면서 네 얘기를 했어. 우리 여자 셋은 여전히 매일 안부를 주고받는 절친이고, 너희 남자 셋도 그렇게 함께 늙어가고 있었더라. 그 아이들은 이제 남자 둘이 되어서 쓸쓸해 보였어. 


13살 해맑은 얼굴의 소년인 너를 만났고, 세상을 먼저 알아버린 것 같았던 너의 청소년기를 보았고, 결혼식에서 보았던 사랑에 빠진 한 청년을 지나,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던 네 자식들의 돌잔치를 넘어, 이제 너의 장례식까지 다녀오니 내가 마치 너라는 사람의 인생 전체를 목격한 사람이 된 것 같다. 


나는 평범한 학생에서 직장 다니다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없지. 이 나이에도 아직 뭘 해야 될지도 모르고 철도 덜 들었는데..... 내가 이런 얘기를 한다면, 넌 나한테 세상을 모른다며 헛똑똑이라며 혀를 끌끌 차며 잔소리를 늘어놨을 텐데.... 


이제 네가 하늘에서 가끔 내가 어떻게 사나 들여다 봐주라. 뭐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곱게 늙은 할머니가 되어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세상이 있다면, 그래서 다시 만난다면, 


그땐... 네가 내 이야기를 좀 해주라. 내가 너를 기억하는 것 처럼 너도 날 기억해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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