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가라 하와이

prelude, wild thoughts(1)

by 마리리

하와이 가보셨어요? 저는 신혼여행지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언제 가게 되려나 하고 이런저런 로맨틱한 상상을 해 보곤 했었는데. 이렇게 혼자 가게 되니 왜 이렇게 속이 쓰리죠.


이제 막 부부가 된 남녀가 똑같은 옷을 입고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10시간이나 보고 앉아 있어야 하다니. 그것도 벨트에 묶인 채로요.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은 그런 제스처들 있잖아요. 남들은 철저히 주변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커플들. 생각만 해도 질투가, 아니 분노가 일 것 같아요. (이 시점에선 묶여있다는 게 다행이네요. 그래서 '안전'벨트인가요)


전 올해 마흔 하나가 되었어요. 아 참, 하와이 가면 서른아홉이다. 아직 생일 안 지났으니까. 괜히 기분이 좋아지네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요? 아, 그래서 그렇게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는구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라서.


그렇게 따지면 통장잔고도 숫자에 불과하고, 내가 사는 아파트 평수도 숫자에 불과하고. 정량화할 수 있는 건 모조리 숫자에 불과하잖아요. 그저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숫자들이라는 걸까요? 숫자로 아이덴티티가 부여되는 건 죄수들 이잖아요? 수감번호 503번! 라떼 학교를 다닐 땐, 번호로 불리는 일이 많았죠. 3번, 13번, 23번 나와서 문제 풀어봐.


우리는 숫자로 줄 세우기에 능숙합니다. 24평 자가/금융 자산 5억 40세 나오세요. 자산 6억 39세 뒤에 서세요. 그래요, 돈 많은 네가 형 하세요.


어쨌거나 제가 '아, 저는 사십 넘었어요.'라고 하면 사람들은 '어머,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요'라고 얘기해요. 이건 '하와유' 하면 '파인 쌩큐 앤드유' 하는 그런 주입식 회화 같은 거예요. 얼굴 안 보고도 할 수 있는 자동 드립이죠.


요즘 제가 좀 꼬였어요. 이해해 주세요. 얼마 전에 7년을 만나온 남자 친구랑 헤어졌거든요. 그러고 나니까 이제 내 인생에 다시 연애나 결혼이라는 건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사는 오피스텔 지하에 제주도에서 시작했다는 유명한 커피숍이 있는데요. 거기서 헤어졌어요. 사실 연락도 시들하고 안 만난 지도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어서 눈치를 채긴 했었거든요. 올 것이 왔구나. 이 커피숍은 너티 클라우드라는 커피가 유명한데, 달달하죠. 근데 먹으면 나중에 속이 안 좋아져요. 사랑이란 그런 거란 말입니다.


오래 만나면서 부침이 좀 있긴 했지만, 이번엔 확실히 달랐어요. 그 날은 주말이라 사람도 많고 어찌나 시끄러운지 빨리 집에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어정쩡하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헤어졌어요. 배가 아파왔거든요. 잘 살아. 그래, 너도.

이것이 바로 중년의 이별이다!


집에 올라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억울했어요. 이거 아주 나쁜 새끼네. 꽃 같은 30대를 다 보내고, 40 되니까 내가 늙어서 이제 싫어졌다는 거야 뭐야. 지는 두 살이나 더 많으면서, 지도 영감인 주제에. 그를 원망하면서 나에 대한 연민이 커지니까 눈물이 나는 거예요. 난 뭐야, 이제 이 나이에 어쩌라는 거야.


좀 울다가 생각해보니 왜 울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군요. 별로 슬픈 것 같지 않았어요. 내가 애초부터 그런 비련의 여주인공도 아니고 내 30대도 꽃과는 거리가 멀었죠. 결혼을 원했던 것도 아니고, 그가 비정한 죽일 놈도 아니었고요. 그저 우리의 관계가 수명을 다한 것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변명도 필요 없는 이별이었거든요.


그리고 일어나서 맥주 한 캔 마셨어요.


또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우리가 가끔 결혼 얘기를 하긴 했지만, 진지하게 한 적은 별로 없었구나. 둘 다 일이 바빠서 주중에는 거의 못 봤거든요. 주말에 만나면 영화 보고 술 마시고, 똑같은 패턴으로 섹스하고, 휴가 맞춰서 여행 가고. 거의 주말부부 같은 생활을 한 건가 싶더라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연애 초반에 결혼이란 걸 했으면 어땠을까. 너 만이 내 세상 같던 그때 말이에요. 우리 나이에는 권태로운 결혼 생활을 끝내고 이혼했다고 하는 편이, 연애하다 헤어졌다고 하는 것보다 더 그럴싸하게 들리지 않나요? 한 번도 선택을 하지 않은 것과 선택했지만 실패한 것. 하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면서요.


왜 결혼 안 하셨어요? 누구든 이 질문을 하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이건 아주 재미있는 게임이거든요. 이 사람에게는 어떤 결정적 뒤틀림이 있는 걸까? 탐색이 시작돼요. 그러고는 마침내, 그럼 그렇지. 저로써는 부인할 수 없는 이유를 누구나 하나씩은 찾아 내고야 말죠. 당해낼 수가 없어요.


어떤 책에서는 그러는 당신은 왜 결혼하셨어요?라고 되물어보라는데, 그것도 꽤 귀찮은 일이 됩니다. 그 뒤로 결혼/비혼 공방과 함께 어쭙잖은 조언들이 지루하게 이어질 것이 뻔하고, 어차피 내 인생엔 관심 없을 거였으니까요.


(계속)

하와이 비밥 Hawaii Beb하와이 비밥 Hawaii Bebopop



Photo by Tyler Nix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