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가라 하와이

prelude, wild thoughts(2)

by 마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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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관계가 청산된 이후에는 더 일에 매달렸어요. 제가 마침 이직을 했고,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정말 정신이 없었거든요. 출장도 많았고요. 시차 적응이고 뭐고 한 달에도 몇 번씩 런던과 서울을 왔다 갔다 했어요. 구글 캘린더에 빼곡하게 들어가 있는 미팅과 보고서 일정들. 그래, 이렇게 중년을 불태워보자. 스타트업에서 늙어 보이면 안 되니까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자. 싸바싸바쌉싸바 해 보즈아!


회사 파티에서 보니, 무대에 나와서 열심히 춤을 추고 있는 건 죄다 40이 넘은 사람들이더군요. 29살 대표는 아예 코빼기도 안 보이고요. 20대 젊은 친구들은 짝짓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어요. 질투가 났어요. 인간의 몸으로 구현된 청춘은 그 존재만으로 오만해 보였습니다. 네 들도 늙어, 이 자식들아.


젊음에 대한 숭배는 글로벌한 현상이니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직 젊음이 정상을 차지하고, 또 새롭게 태어난 젊음이 다시 그 정상을 차지하고. 그런 거잖아요. 삶의 순환이라는 건. 잭 런던의 말처럼 청춘은 나름의 의지를 갖고 있고 그것은 결코, 네버, 죽지 않으니까요.


한국에 있을 땐 시간 내서 피부과에 가서 백옥주사, 신데렐라 주사 이런 것도 맞았어요. 이런 주사는 도대체 효과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지만, 내가 나를 위해 투자하고 있다는 자기 위로인 거죠. 만족했어요. 10회에 35만 원 이면 괜찮지 않아요? 이런 걸 하니까 그나마 그 나이로 안 보인다는 얘기라도 듣는 거 아니겠어요? 아, 어느 병원인지는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아드레날린 주사를 맞은 욕망의 육상선수처럼 저는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만 산다. 잠은 죽어서 자는 것이다. 하지만 바쁘기만 하고 성과는 없었어요. 스타트업이라는 것이 그래요. 이건 신앙 같은 거더라고요. 믿는 자에게만 보이는 비전을 좇아가며, 열심히 페달을 밟았지만 빛이 보이지 않았어요. 나의 믿음이 부족하다. 5천억씩이나 투자를 받은 회사의 비전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나의 모자람일 뿐이다.


대표랑 얘기도 하고, 기술 책임자들도 쫓아다니고, 파트너사들 피칭도 수십 군데를 했죠. 명상도 하고 요가도 하고 1년이 다 되도록 노력했지만 보이지 않더군요. 몸은 몸대로 지쳤고요. 살이 빠지고 있었어요. 악몽도 꾸고, 자다가 갑자기 심장이 쿵 떨어졌다가 터질 정도로 벌렁벌렁 거리는 느낌 아세요?


이런 게 번아웃의 증상이더군요.


그동안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서인지 이렇게 정신적으로 쓰러지고 나서는 일어나기가 힘들더라고요. 아시잖아요. 제 연애만 봐도. 젠장, 뭐 이래. 그래서 한 달 정도 눈치 보다가 사표 냈어요. 40대에 이직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데, 그냥 계속 견뎌야 하나. 별별 생각을 다했는데 제가 의지박약이라 더는 못하겠더라고요. 페이스 조절을 하지 못한 거죠. 결국엔.


피넛츠에서 라이너스가 찰리 브라운에게 그러잖아요. 도망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복잡한 일은 없다고.


전 도망쳐 버렸어요. 퇴사하고 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병원에도 다녔고요.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니까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조금씩 비어 가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있었죠.


그러다가 하와이에 사는 친척 언니가 이번에 결혼을 한다고 카톡을 보내온 거예요. 언니가 저 보다 세 살 많은데, 우리가 비슷한 나이에 마음이 잘 맞아서 제가 잘 따랐거든요. 작년에는 남자 친구랑 한국에 나왔었는데, 그때 결혼할 것 같다고 하더니, 정말 하게 되었나 봐요.


전 뭐 별로 할 일도 없고, 하와이에 가면 날씨도 좋다 그래서 가기로 마음먹은 거죠. 좀 있음 추워질 거잖아요. 지금은 마음이 더 춥....아니 아직 결혼식은 석 달이나 남았지만 언니 결혼 준비도 도와주고 휴식도 필요하다는 핑계로 비행기표를 예약했어요. 저 원래 이렇게 말 많은 애 아닌데, 편하게 해 주시니까 말이 많아졌네요.


출국은 내일모레예요. 내일은 짐을 싸 봐야겠어요.


(계속)



To be continued

Photo by Tyler Nix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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