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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맘만 Nov 10. 2023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

과연 편안하고, 자유로울까? 

훌쩍 자란 아이들과 함께하는 4인 가족 여행에서 호텔 룸 하나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 

커넥팅 룸 불가, 트윈 베드 불가한 곳의 더블룸 2개를 예약했다. 


초등학교 5학년인 딸과 나, 중학교 2학년인 아들과 아빠가 3일간 룸메이트가 되었다. 


2023년 10월 중순. 아침 6시. 

달랏

Đà Lạt. 


자연스레 떠진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아직 룸메이트는 한밤 중이었다. 

신랑에게 산책이라도 나가자고 연락해 볼까, 하던 차에, 

같은 층 다른 룸에서 자고 있을 줄 알았던 신랑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그렇게 우리는 5분 뒤 같은 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다. 


첫째 날 아침 산책은 제일 유명한 달랏역까지 사전 답사를 다녀왔다. 

Dalat Railway station. 

아이와 함께 아침식사 후에 갈 곳이지만, 걸어서 한번쯤 더 다녀와도 될 법한 거리였다. 


둘 다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야 마음이 놓이는 타입이다. 

그러다 보니, 긴 여행의 경우는 각종 숙소의 주소와 연락처, 현지에서 받게 될 영수증을 붙일 장소, 쓰게 될 돈을 기입할 칸, 여행지에서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을 적을 만한 자리까지 만든 여행 책자를 만들어 들고 다니기도 할 정도였다. 


점점 항공권, 숙소만 예약하고, 현지에서 그때그때 갈 곳, 먹을 음식, 살 것들이 정해지는 스타일로 바뀌는 참이었다. 


그래도 "사전 답사"라 이름 붙이는 걸 보면, 치밀함 꼼꼼함은 그냥 몸에 베인 거다. 

사실 달랏역까지 가 보자는 구실이 생긴 거고, 달랏역까지 가는 길, 그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을 느끼고 싶었다. 

 

평일 아침시간. 

현지 사람들의 일상에 우리가 잠시 함께 머무르는 느낌을 느끼고 싶었다. 


가게 앞 작은 의자에 앉아 유리컵에 담긴 노란 차를 홀짝이는 사람. 

같은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하는 사람.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는 사람. 

이른 시간 이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인력시장에서 하루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한 무리의 모습은 여행자처럼 보이기도 했고, 

학교 기숙사에서 갓 나온 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걸으며, 생경한 소리를 듣고, 모습을 보며 상상하고, 그러다 또 생각나는 일이 있으며 말하며, 하루 산책을 마쳤다. 

'사전 답사' 결과물? 

달랏역은 입장료(1인당 5000 đ, 약 300원)가 있다는 정보를 얻어,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둘째 날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호수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쑤안 흐엉 호수

Xuan Huong Lake


제 갈길 가는 입마개는 커녕 목줄도 없는 큰 개를 지나쳐, 호수에 도착했다. 

둥글게 모여 앉아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는 듯 보이는 사람들. 

태극권을 하는 사람들. 

아오자이를 입고 광장(람비엔 광장, Lam Vien Square) 앞에서 호수 앞, 포토 스팟에서 사진기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여유롭게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 




마지막 날 아침은 달랏 꽃밭을 목적지로 정했다. 

Dalat Flower Park


아침 산책 덕에 매일 만보 이상을 걷는 것, 

어느새 목적지 보다 "건강" 앱에 찍히는 숫자에 더 관심이 갔다.

 

할 것, 해야 할 것이 없는 무위도식의 삶, 안빈낙도의 삶이 이런 건가 싶다. 


그럼 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불편한 감정이 자꾸 일어났다. 

이게 뭔가? 이게 뭘까? 고민하던 차였다. 


어제저녁, 영어 컨설팅 20분. 

네모난 피씨 창에 지난주에 이어 또 만난 원어민이 등장했다.

20대 여성, 남자 친구와 한국을 여행하고 있는 유러피안이다.  

짧게 시작한 한 주 근황이 꽤나 진지해버렸다. 


"나 지금 여행 중이야. 가족들이랑."

"그래? 기분 어때?" 

"음.. 모르겠어. 편안한 데, 편안하다고 말해버리기는 불편해."

"뭐가 불편해?"

"매일 집에서 하던 것들을 못하고 있는 것이 불편한 것 같아. 그렇다고 집에 막 가고 싶고 그런 건 아니야. 여행이 싫은 것도 아니고. 지루하다고 하기에는 완전하지 않는데..."

 "You feel ashamed." 


으잉? ahsamed?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함. 

생산적이지 못한 느낌이 든 불안한 나에게 내 감정을 그냥 말해줄 뿐이었는데도, 한결 가벼워졌다.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남편과도 이야기했다.

 

달랏 꽃 정원을 나와 숙소를 돌아가는 길. 

쑤안 흐엉 호수의 다른 쪽을 돌아가는 그 길에서. 


"어떤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여행"을 하고 있는 우리인데, 이 낯선 감정은 무엇일까? 

한 참을 이야기하고, 몇 번을 끄덕였다. 


맥주 한잔 하지 않고도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8박 9일의 여행 마지막 날임에도 아쉽지도, 집에 애타게 가고 싶지도 않은 낯선 감정을 그나마 함께 공유하는 사람이 있으니 다행이다 싶어 서로가 즐겁게 이야기를 하던 중에, 우리는 테이크 아웃 커피점 앞에서 약속한 듯이 멈췄다. 



빈 속에는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위와 장을 가진 우리지만, 커피 한잔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어느 인터넷 지도에도 없는, 어떤 책자에도 안 나올 곳을 발견한 기쁨인지, 

딱 목이 말랐던 찰나에 만난 오아시스 같은 곳이라서인지, 

한 끝 디테일이 필요하던 관광지에서의 아쉬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올레를 외쳤다. 


신랑은 계좌이체를 위한 큐알코드가 찍힌 작은 나무 소품과, 

가게 컨셉 "The Door"에 어울리는 뒤편 커튼에 놀라 했고, 


나는 그녀의 가게 간판이자 메뉴판에 제법 크게 적힌 한 문장에 심장이 뛰었다. 


"Everything you want is behind the door."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것, 답답해하는 것도 결국 가까운 곳에 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23000 đ (1500원) 짜리 베트남 커피 Bạc Xỉu 한 잔으로 충분한 여행이었다.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아, 다시 마음이 그리고 우리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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