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지자체 홈페이지에서 <대화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소소한 주제를 놓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대화한다는 테마였다. 기술문명이 발전하고 디지털이 익숙한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쉽게, 많이 소통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대화다운 대화를 한 기억은 너무 오래전에 멈춰 있다. 면대면의 대화나 전화가 어렵고 채팅이나 문자가 편하다고 느끼는 세상이 아닌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무겁지 않은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에 흥미가 생겨 신청했다. 아무 정보가 없기에 흥미로울 수 있다. 상대에 대해 안다는 것은 편견과 선입견을 주고 때로 불편할 수 있지만, 모른다는 것은 아무 기대가 없기에 부담이나 상처받을 일이 없다. 3~4인석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고 테이블에는 주제 질문지가 여러 장 있었다. 밥 vs 빵, 전통 유지 vs 변화 시도, 계획 여행 vs 즉흥 여행 같은 주제였다.
우리 테이블의 첫 주제는 ‘맛있는 거 먼저 먹기 vs 맛없는 거 먼저 먹기’였다. 세 명은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다고 말했고 나만 맛없고 안 예쁜 걸 먼저 먹는다고 답했다. 다 먹을 수 없고 남으면 버리게 되니 맛있는 걸 먼저 먹는다고 대답하는 그들과 달리 나는 못생기고 맛없는 걸 먼저 먹고 맛있는 걸 나중에 먹어야지 하는데 경험을 통해 보니 남들이 맛있는 걸 먼저 먹어서 내 몫으로 남지 않더라. 맛있는 걸 먼저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역시나 안 예쁜 걸 먼저 먹게 된다고 했다. 60대 여성 참가자가 배려하느라 그러는 거라며 말했다.
“우리 딸이 어릴 때 통닭을 시키면 항상 가슴살만 먹었어요. 아빠와 아들이 닭다리를 먹고. 나는 딸이 가슴살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스무 살이 넘어서 그러더라고. 가족들이 닭다리를 좋아하니까 그냥 아무도 안 먹는 가슴살 먹은 거라고. 그때 어찌나 마음이 아팠던지 그 뒤로는 딸의 마음을 살피게 돼요. 선생님도 배려하느라고 그랬구나. 괜히 눈물 난다.” 하며 내 등을 쓸었다. 순간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가족이니까 알아주겠거니 하는 건 희망이지 현실은 아니잖아요. ‘엄마는 생선 대가리가 맛있어서 먹는 거야.’ 하는 말을 아이가 그대로 믿는 것처럼요. 아이만이 아니라 부모도 자식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옆에 앉은 40대 여성은
“아… 전 이기적이었나 봐요. 당연히 맛있는 거 먹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는데… 무슨 상황이 있었던 건가요? 엄마한테 표현을 안 하셨어요?”하고 심층 질문을 했다. “비밀 없이 다정한 사이고 엄마니까 알거라는 믿음이었던 거죠. 친구들 사이에서도 부러움 사는 모녀였는데 제가 몹시 힘들 때도 알아서 하겠거니 넘기는 걸 보고 알았어요. 엄마가 나를 이해한 적이 없구나.”라고 말했다. “그래서 엄마랑 헤어졌나요?” 궁금하다는 듯 연달아 세부 질문을 했다. “네… 뭐… 거리를 두고 지내고 있어요. 이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이 주제가 왜 여기까지 가는지 모르겠네요. 제 얘긴 여기까지만 하죠.” 하며 서둘러 분위기를 바꿨다. 사소하고 가볍게 할 수 있는 ‘뭐부터 먹어?’라는 질문에 왜 내 사연까지 가게 됐는지 당황스러웠다.
스무 살이 되어 가족에게 배려하느라 그랬다는 옆자리 참가자의 딸은 건강하게 자기표현을 하고 엄마는 그걸 늦게 알아챘다며 마음을 살피는 관계가 부러웠다. 나는 오래 배려하며 살았지만 그런 말을 하지 못했고 그게 당연하게 수용되는 시간을 살았다. 끝내 엄마에게 내 마음을 이해받지 못해 상처받고 멀어졌다. 내 상처와 설움 속에서 현실을 잊어보려고 애쓰고 살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틈타지 않도록 방어하려고 이런 대화의 자리에도 참석했는데 느닷없이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얘기를 하게 되는 상황이 될 줄은 몰랐다. 모든 질문은 가볍고 단순하지만 진지하고 심도 있는 대화가 오갔다. 대화의 자리가 단순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들을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던 반면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얘기가 나온 것에 대한 우울감도 생겼다. 대화를 마치고 일어서는 자리에서 40대 여성 참가자는 내게 “오늘 대화가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기회가 되면 다음에 다시 만나 대화하고 싶네요.”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한 번의 우연한 만남으로 족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