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오늘 갑자기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사진처럼 한 컷만 기억나서 꿈이었는지 상상이었는지 헷갈리는 장면이다.
베란다 앞 유리문 너머로 햇살이 깊게 들어와 바닥을 쓸고 있었고 긴치마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햇살을 받으며 유리문 밖을 보고 있었다. 무릎 아래로만 보였던 햇살과 베란다 유리문, 긴치마가 전부지만 여성스럽고 편안하고 조급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목소리도 없고 얼굴도 보이지 않았지만, 따스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졌고 그 사람이 나라고 생각했다.
당시는 서울에 살고 있었고 마당은 커녕 햇살조차 마음껏 들이기 힘든 집에 살던 시기여서 현실이 불가하니 그런 꿈을 꾸는 거라 생각했다. 손에 닿을 수 없는 이상 혹은 바람. 아마도 현실에서 채울 수 없는 결핍이 무의식 속에서 떠올랐는지 모른다. 이사를 앞두고 막연히 볕이 잘 들고, 마당이 있는 조용한 집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그러나 현실은 늘 반대여서 적당한 집을 찾기 어려웠고 여러 집을 전전하다 부동산 사이트의 사진에 꽂혀 지방에 집을 보러 갔었다. 소망하던 작은 마당, 햇살이 넘치게 들어오는 베란다와 조용한 집, 꿈에서 보던 그 부분이 충족되는 집이어서 계약했다. 1년 동안 집만 보느라 쏟아버린 시간과 잦은 이사로 지쳐버린 상태에서 그 집은 희망처럼 보였다.
집다운 집에서 살아보자는 소망으로 햇살이 잘 들고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아픈 상태로 이사한 첫날 외풍 없이 따뜻한 방 안에서 위안받았다. 그래서 작은 희망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을 꺾기라도 하듯 현실은 늘 소망을 배신한다. 햇살과 마당과 조용함은 충족되었으나 이사 직후부터 이전에 겪어보지 않은 새로운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으니까. 이미 하자로 인한 잦은 이사 스트레스가 사라지지 않은 터라 가슴이 철렁했다. 문제 하나가 사라지고 집을 꾸미고 마음을 다 잡을 때쯤 다른 문제가 생겨 혼자 사는 집에 업자 여럿이 방문하는 상태가 불편했다. 내 영역에 집주인과 외부인이 자주 방문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편할 수 없다. 언제 또 이사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짐을 더 들이지 않고 지냈다.
벽을 뚫고 바닥을 뜯는 공사도 했고 벽지를 다시 바르는 일이 생기니 살림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언제라도 쉽게 이사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넓은 집에 살림은 없는 휑한 상태가 되니 이사를 하다만 집처럼 마음도 온전히 붙이지 못하게 되었다. 작고 아담한 것을 좋아하는데 혼자 살기엔 바닥의 길이도 천장의 길이도 길었다. 남들은 그런 공간을 ‘좋은 집’이라고 부를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과한 여백은 때로 공허함을 주고, 높은 천장은 나를 작게 만든다. 이 집의 구조는 나의 감정선과 어긋나 있었다.
문득 그날 그 꿈의 장면과 유사한 집에 살고 있는데 꿈에서 느꼈던 평온과 여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릎 아래로만 보였던 그 여자는 내가 아니었을까. 이상은 늘 현실과 다른 것을 꿈꾸게 하지만 그 또한 현실이 되면 다른 이상을 꿈꾸게 한다. 내가 바라던 것은 거창한 공간이 아니다. 내가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크기와 나에게 맞는 온도,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의 평화다.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집이 아니라, 내 마음이 편하다고 느낄 수 있는, 아늑하고 소박한 집.
어쩌면 그 장면은 오래전부터 내 마음이 보내던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바쁘게,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살다 보면 그런 신호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문득, 느닷없이 떠오른 그 장면이 집에 대한 내 소망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깨끗하고 보기에 적당한 집에서는 살아왔지만 아직 그 장면의 완성된 평온함에는 도달하지 못해 헤매는지 모른다. 많은 하자가 멀쩡해 보이는 집에서 생겼던 것처럼 마음과 맞는 집도 살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어디가 좋은 집인지 살아보기 전엔 알 수가 없어서 자꾸만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집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다리만 보이는 그 장면에서 느껴졌던 따뜻한 햇살과 고요와 여유가 느껴지는 집을 만나고 싶다. 나는 그런 집으로 꼭 이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