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학교에 입학하면 생기는 생활기록부에는 학생을 평가하는 여러 지표가 있다. 성적과 학생을 평가하는 담임의 의견 외에도 장래희망이라는 항목이 있다. 이제 학교생활을 시작하는, 세상이나 직업세계를 알지도 못하는 꼬마를 대상으로 먼 미래의 희망직업을 정하라고 한다. 초등학생의 장래희망은 본인이 아닌 부모의 희망이 주입되는 경우가 많다. 시대별로 안정적이고 돈을 잘 번다는 직업이 그 칸을 채운다. 교사, 의사, 법률가, 공무원, 연예인, 유튜버 등등 모든 아이가 다 이런 직업을 희망하고 그 희망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세상에 저 직업만 있다면 온전히 돌아가지도 않을 텐데 인기 직종에 안착하기 위해 부모와 사회가 아이를 압박한다. 저 직업만큼 중요한 농부, 어부, 운전사, 청소전문가, 현장 기술자가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입장벽이 낮다고 그 직업이 쉽거나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도 오직 학교 다닌 기간에 비례한 직업만 좋은 일이라 말하고 그런 직업을 꿈꾸지 않으면 타박을 듣는다.
농사, 환경미화, 택배배송을 아무나 하는 일로 치부한다. 그들이 없으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으면서도 말이다. 우리는 그 일을 잘 해내지 못하고 견뎌내지도 못할 확률이 매우 높다. 이 또한 기술과 전략이 필요한 전문가만 살아남는 직업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의 실체는 귀천이 있다는 의미다. 귀천이 없다면 그런 말이 생길 이유가 없잖은가. 꼭 필요한 일이지만 자신이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둘러대는 거짓말이다. 돈에 따라 가치관이 변하는 세상에서 월급이 높으면 과거엔 상대적으로 무심했던 직업의 경쟁률이 치열한 직종으로 변하기도 한다. 대기업의 제조라인이 그렇고 환경공무관이 그렇듯.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직업은 돈과 비례하지만 가치라는 말로 본심을 숨긴다. 전문직도 가치와 신념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한 목적이니 다를바 없다. 어린이 때부터 의대 반을 다니는 아이들도 적성과 성향이 아니라 직업에 자신의 가치관을, 부모의 욕망을 끼워 맞추는 게 아닐까. 우리는 좋은 의사인지 아닌지 모르고 오직 출신학교만 보고 목숨을 맡기는 시대를 살고 있다.
내 성격검사 결과는 야망이 낮다고 나온다. 야망을 주입받고 자라는 시대에서 목표의식이 없다는 것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 모두가 야망으로 가득하면 그 사회는 엉망이지 않을까. 교육의 영향으로 목표를 강요당하고 살아서 한때는 남들과 비슷한 목표를 가진 적도 있었다. 살면서 스트레스가 많았다. 그건 강요에 의한 것이지 내 성향과 맞지 않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사람들은 몇 세에 어디에 취직해서 몇 세에 어디에 집을 사고 몇 세에 얼마를 모아서… 같은 물질적 계획을 세운다. 나는 마흔쯤 되면 해외봉사를 나가보자는 계획이 있었다. 국내 생활을 정리하고 2년간 저개발국가에 거주하며 봉사하는 일이 내 인생에 있었으면 싶었다. 지원하려면 자격증이나 실무경력이 필요했는데 기술직으로 일한 적이 없으니 자격증을 취득했다. 지원할 수 있는 분야의 자격증이 두 개나 있지만 지원하지는 못했다. 자격증이 있으면 실무경력이 있는 사람과 일하는 동안 배우면서 봉사할 줄 알았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회사에 입사해 실무를 배워 경력이 생기는 것처럼 같은 구조로 생각했다. 기술이 있는 사람이 현지인을 교육해야 하는 걸 몰랐다. 자격요건에 ‘자격증이 있거나 실무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어서 자격증이 있으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기술 분야는 자격증만으로 실무를 바로 할 수 없는 데다 배우며 하기 어려운 타국이기에 지원하지 못했다.
나는 야망이 없다. 집이나 차를 살 생각도 없고 주식도 하지 않는다. 코스피 4천 돌파로 투자할 맛 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남들이 보면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대신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타나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다고 소원을 말하라고 하면 일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는 평수사가 되고 싶다고 빌고 싶었다. 왜 나는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할까. 내가 비정상인가 고민되기도 했는데 내 성향에 이타성이 높고 야망이 없으니 그럴 수 있다고 이해되었다. 그런 사람이 21세기에 한국에서 살고 있으니 고단하고 우울한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가지고 태어난 심성이 다르고 원하는 방향과 에너지가 다른데 모두들 유행 따라 한 방향으로 가라고 한다. 가지 않으면 미련하다고 다그치고, 수용하면 남의 말과 비판에 휩쓸린다는 잔소리 같은 말을 한다. 애초에 그런 주입을 안 했다면 다른 결과였을지 모른다. 아니 다른 나라에서는 같은 결과도 다르게 해석하고 긍정적으로 말할지 모른다. 내 인생의 주체는 나고 남이 책임져 줄 수 없는 삶이니 자신의 방식과 원대로 살아가면 된다. 무엇이 정답이라고 강요하지 말고, 위한답시고 정해주지 말고 자기 인생을 살면 된다. 오래 헤매본 사람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