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주말 저녁 집주인에게 문자가 왔다. 모레 안방 공사를 하려한다는 내용이다. 미간이 구겨졌다. 가을에 얘기한 하자를 한겨울에 공사하는 것도 모자라 또 직전 통보다. 4주 전에도 업자가 하자 상태를 점검하러 온다는 말을 전날 저녁에 통보받았다. 당일 일정이 있어서 안 된다고 했으나 힘들게 구한 업자가 시간이 그때만 된다는 말을 했다. 매번 업자 일정에 맞춰 통보할 뿐 세입자와 시간을 조율하지 않는 상황이 화가 났다. 일정을 미루고 집을 보여주며 업자에게 신신당부했다. 공사할 때는 제발 미리 알려달라고, 나랑 맞춰달라고, 언제 할 건지 미리 일정을 잡자고 했다. 다음 주에 될 거란 말과 달리 4주 만에 업자의 시간에 맞춰 또 통보받고 한겨울 공사가 답답했지만 싸운 들 뭐가 달라질까. 주말부터 큰방의 짐을 빼기 시작했다. 작은방과 베란다에 몰아넣으며 2년도 채 살지 않은 집에서 대체 짐을 몇 번이나 옮기는 거냐며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이사한 첫 달부터 전기 문제를 시작으로 거실, 욕실, 큰방, 작은방을 모두 공사했다. 전기 공사할 때는 거실 짐을 안방에 들여놓고, 작은 방 공사 땐 안방에 몰아넣고, 작년에도 방수업자가 손을 본 후, 셀프 도배를 두 번이나 했는데 곰팡이가 더 넓게 퍼졌다. 천장 누수까지 생겼으니 이번에는 공실처럼 아예 짐을 다 뺐다. 짐을 옮기며 이래서 내가 아픈가 싶었다. 때마다 이삿짐 싸듯 짐을 들었다 놨다 하니 내 허리가 온전할 리 없었다. 사는 동안 내내 이삿짐을 풀지 못한 기분으로 살아서 만기 되면 나가자 싶었다. 한겨울 만기니 겨울 지나고 봄에 이사 갈까 한다고, 두달 전에 하자를 알리면서 얘기했었다. 주인아주머니도 겨울보다는 봄에 나가면 고맙겠다고 했다. 얘기가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4주 뒤에 업자가 하자 상태를 보러 온 날, 주인아저씨는 외출하는 나를 붙잡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어요. 내가 잘 고쳐줄 테니 봄에 나간다는 말은 하지도 말아요.”라고 했다. 집주인에게 내가 좋은 세입자일지 몰라도 내게 이 집은 마음 편할 날 없는 집인데 나갈 생각은 하지도 말라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예민한 마음은 그날 이후로 매일 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공사라도 빨리해 주던가.
지난번 업자는 분명 공사는 밖에서 할 거라고, 방은 곰팡이 긁어내고 벽지를 바르면 된다고 했다. 공사 당일 아침에 도착한 업자는 그때 본 사람이 아니었다. 외벽을 깨는 소리가 한바탕 요란하게 울렸다. 주인아주머니가 마스크를 쓰고 곰팡이 제거제를 들고 들어와 벽지를 뜯기 시작했다. 본인 혼자 한다고 했으나 연세있는 집주인이 혼자 하는 걸 보고 있기도 불편하고 내가 해야 빨리 끝낼 수 있다. “근데 이거 업자가 해야지 이걸 왜 우리가 뜯어요?”하고 물었으나 답이 없었다. 잠시 후 업자가 “고모”하며 들어왔다. 업자가 조카였다. 보통 공사를 할 때는 인부가 같이 오는데 조카 한 사람만 와서 이러는 거였다. 속으로 지난달 주인아저씨가 한 말이 생각나며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더니 내가 다 하게 만드는구나.’ 스트레스가 몰려오고 짐 옮기느라 몸살기가 도는 상태라 더 화가 났다.
업자에게 “오전 중에 끝나는 거 맞죠?” 하니 “이거 시간 오래 걸려요.”라고 말한다. 집주인과의 문자에서 오전중에 끝나면 괜찮다고 분명히 말했고 집주인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저는 오전에 끝나는 거면 가능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일정을 왜 저랑 조율 안 하죠?” 하니 “공사가 어떻게 될지 알고 조율해요? 공사하면서 언제 끝난다고 말해 본 적이 없어요.”란다. 아놔. 말이야! 막걸리야. 공사 계획과 일정이라는 게 있는 건데 이게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었다. “공사 과정이 있을 텐데 대략적인 일정이라도 알려줘야 제 일정도 조절하죠. 오늘도 분명 오전 중에 끝나는 걸로 들었는데 모레면 크리스마스 연휴에 공사한다는 말이잖아요. 와서 공사한다면 저는 무조건 맞춰야 하나요?” 크리스마스라는 말에 움찔한 업자는 조금 차분해진 말투로 오늘 진행되는 내용과 모레 진행되는 내용에 관해서 설명했다. 곰팡이 핀 부분만 뜯어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벽지 색이 달라진다는 이유로 한쪽 벽면을 전부 뜯는다고 했다. 몇 달 있다가 이사 가려던 내겐 악재일 뿐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이사 나간 후 공사를 하지. 2년 내내 곰팡이 핀 벽지로 살았는데, 이제 와서 이러는 건 나를 붙잡으려는 이유겠으나 오히려 불편하게 할 뿐이었다. 곰팡이 제거제를 뿌리고 창문을 활짝 열고 방문을 닫았지만, 거실까지 락스 냄새가 퍼져서 머리가 아팠다. 베란다까지 열어 냄새를 빼느라 한파에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지난겨울에도 명절 직전에 보일러 배관을 교체한다고 방바닥을 뜯느라 고생했는데 이번에도 한겨울에 이러고 있다. 내 세입자 생활엔 왜 이리 하자가 많을까. 단순히 곰팡이 좀 피고 결로 있는 정도가 아니라 벽을 뚫고 바닥을 깨고 전체를 교체해야 하는 공사가 될까. 집은 온전히 쉬고 힘을 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는데 이사 직후부터 생긴 문제는 주기적으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며 긴장하고 불안하게 했다. 집의 하자가 내 잘못은 아니지만 반복되는 문제는 자꾸 ‘내가 얼마나 재수가 없길래’라는 자기 비난의 굴레에 빠지게 한다. 집주인은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 하고 미안해 하니 괜찮은 척 매번 웃으며 넘겼지만 정말이지 내 속은 너덜너덜하다. 이 집이 나랑 안 맞아 계속 아픈 것 같고 어떻게든 이사를 나가고 싶은데 모든 게 끝없는 허들처럼 느껴진다. 모레도 인부 없이 혼자서 외벽 공사하고 실리콘 메꾸고 풀칠하고 도배하는 거라면 하루를 통으로 비워야 한다. 아는 사람이 온 김에 도배까지 하려는 듯 한데 답답한 마음에 도배를 할 줄 아는 내가 나서서 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말에 여행 가려던 계획은 공사를 언제 할지 말해주지 않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만 날렸다. 연극을 보며 나를 위로하려던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크리스마스 계획마저 좌절되었다. 내 인생이고 내 거주 공간인데도 내 뜻대로 되는 게 1도 없는 게 답답했다.
인테리어를 하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원래 공사할 때 세입자랑 조율을 안 해? 매번 나는 업자 시간에 맞춰서 통보를 받아. 매번 내 일정이 망가져.”라고 물었다. 친구는 “아니, 세입자랑 맞춰야지. 낮은 안 된다 주말은 안된다 하면 다 맞춰서 날짜 잡는데.” 했다. 내가 만만한가? 나에겐 한 번도 언제 시간이 되냐고 물어본 적이 없다. 항상 업자가 언제 온다고 통보받았다. 하자가 많은 것도 불편하지만 외부인이 너무 자주 드나들어 쇼윈도에 공개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싫었다. 사는 집인데도 뜨내기 같은 심정이어서 이 집에 정이 들지 않았다. 겨울비까지 세차게 내리는 날 창문을 열어놓아 길바닥에 서 있는 것처럼 발이 시리다. 좋은 집이 아니라 집주인과 연락할 일이 없는 집을 소망할 뿐인데 그리 힘든 바람일까. 평온하고 싶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내 삶이 지겹고 지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