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연말

#17

by 마릴라 Marilla

빨간 날을 싫어한다. 약속이 많고 들뜨는 사람들 속에서 자주 쓸쓸했다. 연말연시도 싫어한다. TV에서는 화려한 셀럽들의 시상식을 내내 보여준다. 원치 않는 장면과 시끌벅적한 소식을 들어야 하는 게 싫다. 이번 연말엔 다른 나라에 있고 싶었다. 춥지 않은 곳에서 연말의 기분을 피하고 싶었다. 나만의 일정을 만들어 외롭지 않으려 했다.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고 폐 끼치는 일도 아닌 나만의 소박한 계획임에도 내 인생은 그마저도 사치인가 싶다. 크리스마스이브, 나는 내내 화난 상태였다.


날이 바뀌어도 왜 계속 화가 지속될까 생각했다. 화가 많은 사람이어서, 성격이 모나서 그런가. 습관처럼 나를 의심했다. 이 화의 본질은 영역의 침해, 결정권의 침해가 아닐까 싶었다. 3년째 집 문제로 스트레스받고 있는데 정말이지 끊이지 않고 이 문제는 나를 물고 늘어진다. 한겨울, 크리스마스에 공사하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화나는 건 아니다. 정당한 세입자로 대여했는데 가는 집마다 왜 매번 이렇게 새로운 하자가 생겨나는가. 하자는 생길 수 있으나 해결을 왜 그리 어렵게 하는가.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고 한참이 지나서, 겨울마다 이렇게 큰 공사를 하는지, 계속되는 하자에 만기 되면 이사한다고 말했는데도 왜 붙잡아서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지, 문제 해결을 할 거면 제대로 된 업자를 데려다 해 주던가. 누가 봐도 싸게 해결하려다 손해는 세입자가 보는 상황이 싫었다. 좋은 기술자를 섭외하느라 늦었다는 말과 달리 실제 공사에는 그 기술자의 보조로 왔던 조카 혼자였고 도배기술자가 아니지만 부른 김에 도배까지 하겠다는 점에서 이미 내 불편이 예상되었다. 지난겨울, 보일러 바닥 배관 교체로 바닥을 뜯는 공사 후 장판을 교체할 때도 그 보일러 업자에게 맡겨 중간을 30cm도 넘게 겹쳐 놓지 않나, 벽지와 닿는 부분을 20cm 넘게 올라타게 하질 않나, 모서리 칼질도 잘못해서 전체를 걷어내고 내가 다시 재단해서 깔았다.


돈 받는 기술자는 고객이 원하는 날짜를 맞추기 마련이건만 한참 지나 한겨울에 온다는 건 비용상 후순위라는 말이다. 조카 혼자 와서 한겨울에 외벽 공사에 도배까지 한다는 건 세입자 편의가 아닌 최저가의 이유다. 조카가 올 거였으면 추워지기 전에 해주던가. 이러면서 집주인 편하자고 이사하지 말라고 하는 건 너무 이기적이지. 더 우울하고 화가 계속되는 이유는 이 집의 문제를 타고 과거의 기억까지 소환되었기 때문이다. 집주인이 좋아하는 안전하고 깔끔한 세입자지만 내가 살았던 집은 하나같이 무탈하지 않았다. 세입자의 책임을 다하는데 왜 집으로부터 늘 공격받는 걸까. 수많은 하자 경험은 마음을 쪼그라들게 하고 전세금을 빼야 하는 약자가 되어 늘 참게 만들었다.




오래전, 혼자 있던 집에 사전 동의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집주인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친구의 방에 들어가 아무렇지 않게 맘대로 정리하기도 했다. 다음 집에선 싱크대를 바꿔준다고, 사는 동안 전세금을 올리지 않는다더니 싱크대 교체는 고사하고 자녀 학비가 많이 든다며 전세금만 올리기도 했다. 다음 집에선 이사 직후 싱크대 배수가 안 돼서 말했는데도 해결해 주지 않더니 보일러 사망, 현관 잠금장치 사망, 변기 배수장치 사망, 윗집 배관 터져 천장 누수, 코드를 다 뽑아도 계속 누전 차단기가 떨어지는 등 노후로 수명이 다해서 고장 난 것도 전세로 사는 사람이 고쳐야 한다며 안 고쳐 살 거면 나가라고 하기도 했다.


다음 집에선 싱크대건 수전이건 손만 닿으면 전기가 와서 몇 달을 고생했고, 집에 문제가 없을 때는 사람이 문제를 만들었다. 벽을 맞댄 옆집에 이사 온 사람이 새벽마다 고성을 지르는 바람에 잠을 잘 수 없었고, 앞 건물 빌라에서는 오후만 되면 정신이상 증세인지 아저씨가 창밖을 향해 옆집 여자를 욕하는 소리에 괴로움을 겪었다. 다음 집에서는 겨울이 되면 현관 잠금장치가 얼고 여름이면 마른 벽지에 잘 봐야만 보이는 곰팡이가 생겼다. 다음 집부터는 이사 직후 집 전체에 곰팡이가 피거나 바닥에 물이 고여 벽지를 타고 올라오거나 온도조절기는 정상인데 난방이 안 되거나 하는 문제가 겹쳐 2~3달 간격으로 이사하는 상황을 지나 이 집까지 왔다. 이 집도 첫 달부터 전기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으나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여서 그냥 사는 중이다. 내가 부주의한 것도 아니고 관리 의무를 안 한 것도 아닌데 운이 나쁜 건지, 집이 노후되고 고장 날 즈음에 내가 세입자가 되는 순번이 된 것인지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내가 사는동안 고치게 되니 다음 세입자는 큰 문제없이 살았을 것이다. 집주인들이 좋아하는 세입자인데 나는 왜 마음 편히 살기가 어려운 걸까.


집을 보러 다니다 보면 정말 쓰레기 소굴처럼 해놓고 사는 사람도 많고, 그런 사람 중에는 대책 없이 해놓고 당당하게 집을 빼 집주인을 애먹이는 세입자도 많다. 착한 세입자인데도 나는 왜 불편을 당하는 걸까. 싸움도 못하고 아쉬운 소리도 못하는 여자여서 호구가 되는 걸까? 서울에 살다 보면 남자 혼자는 기피하고 여자만 세입자로 받는 집이 많다. 대체로 남자가 집을 험하게 쓴다고 보는 편견이라 생각했다.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인데 과거 통념으로 여성 세입자를 선호하는 거라고. 그러나 오랜 세입자 살이에서 잘못도 없는데 늘 불편을 당하고 손해 보는 생활을 겪으며 지금 드는 생각은 여자 혼자인 세입자가 대하기 쉬워서는 아닐까 싶었다. 적지 않은 전세보증금이 걸려있고 나갈 때 고생한 기억도 있어 되도록 집주인과 얼굴 붉히지 않으려고 좋게 좋게 대하고 이해했더니 만만히 보는 것 같다는 자격지심마저 생긴다. 차분하게 기술적으로 화를 내고 자기 권리를 찾는 사람이 무척 부럽다. 화가 나도 결국 좋은 말로 정리하고 속으로만 골병드는 생활이 싫다. 왜 내 집에는 항상 문제가 생길까. 왜 이렇게 고생스럽고 불편하고 괴로울까.


문제를 일으키는 집은 겉보기에 허름한 집이 아니다. 도배장판이 교체되고 깨끗한 집에서 늘 문제가 생겼다. 내가 가장 마음 편했던 집은 역설적이게도 벽지가 오래되고 창가에 곰팡이도 좀 있고 부엌과 화장실은 좁은, 처음으로 혼자 독립했던 집이었다. 미리 문제를 인식하고 간 그 집이 가장 조용하고 아늑했고 마음 편했다. 아무리 발품을 팔아 좋아 보이는 집을 계약해도 살아보기 전엔 그 집에 어떤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마음 편해야 할 집이 발품이 아니라 복불복이라는 게 슬프다. 나는 언제쯤 복을 뽑을 수 있을까. 집 생각만으로도 깊은 우울에 빠져들 정도로 집 복이 없어서 이사 생각만 하면 한숨이 절로 난다. 제발 내년엔 무탈한 집으로 이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