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서러운 기억

#18

by 마릴라 Marilla

꿈을 꿨다는 흔적만 남는 날이 있고 꿈의 내용이 또렷이 기억나는 날이 있다. 오늘도 꿈이 또렷했다. 요즘은 꿈도 4D처럼 느껴져서 꿈속에서도 현실과 헷갈릴 때가 있다. 오늘은 꿈에 이사했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예전에 살던 집주인 가족들이 있었다. 이른바 룸 셰어 형태의 집인 듯했다. 순간 내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과거 그 집에 사는 6년 동안 만날 수 있는 모든 하자를 봤는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세입자가 고쳐 쓰라고 해서 힘들었던 집이다. 그 집으로 이사한 날, 싱크대 배수가 되지 않아 말했더니 와서 보고도 그냥 써보라고 했고, 방문이 안 닫혀 말했더니 대패로 방턱을 마구 깎아 더 어긋나게 만들어놓고는 가버렸다. 17년 된 보일러가 고장이 났는데(그냥 봐도 수명을 다해서 고장 난 것인데) 고치면 반은 보태주겠다고 인심 쓰듯 말했다. 기사님이 수리가 아니라 교체해야 한다고 집주인과 통화해서 겨우 해결했는데 그것도 한 달 뒤에 해줘서 온수를 쓰지도 못했다. 보일러 고장 무렵 계속 누전 차단기가 떨어졌다. 코드가 꽂힌 건 냉장고뿐이고 나머지는 사용할 때만 꽂아서 과부하가 날 게 없는데 계속 떨어져 냉장고 코드까지 뽑았는 데도 떨어졌다. 대체 어디서 문제가 생겼나 했더니 보일러였다. 고장 난 보일러가 문제를 일으켜 차단기를 내려가게 했으니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된 게 맞았다.


한 번은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주방 천장에서 물이 쏟아졌다. 형광등을 타고 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더 놀랐다. 주인집 배관이 터진 거였다. 변기 수조의 장치가 너무 오래되어서 고장 났을 때도 안 고쳐줘서 업자를 불렀는데 업자가 변기 아래 수도 밸브를 열다가 물벼락을 맞았다. 수도관이 삭아서 밸브를 돌리자 그냥 터진 거였다. 업자는 물벼락을 맞고 밸브까지 고쳐야 했고 나는 수리비 벼락을 맞았다. 업자는 집주인이 해줘야 하는 것도 안 고쳐주는 집에서 왜 사느냐고 이사 가라고 말했다. 한겨울 밤에 귀가해서 현관에 열쇠를 넣고 돌렸는데 문이 열리는 게 아니고 아예 잠겼다. 안에서 누르는 잠금장치가 오래되어서 저절로 내려가 그대로 잠긴 것이다. 두부 한 모를 들고 서 있는데 너무 막막했다. 집엔 들어가야겠기에 어쩔 수 없이 집주인에게 얘기해서 강제 개방하고 겨우 들어갔다. 사비로 고치면 인심 쓰듯 “지난달 수도세는 청구 안 했어.”라며 만 원도 안 하는 수도세로 상계하는 사람이었다.


세입자가 바뀔 때마다 점검하면 좋을 텐데, 전세는 세입자가 고쳐써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의 집주인을 만나면 고생길이 열린다. 보일러든 현관 열쇠든 변기 물 내림 장치든 한 번 설치하면 10년 이상 20년 가까이 쓰게 된다. 안 좋게 보려면 ‘얼마나 내가 재수가 없으면 나한테 이런 문제가 다 생기는 걸까.’라고 자책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잘못 써서 고장 난 게 아니라 수명을 다해서 교체해야 할 시기에 하필 내가 세입자 순번이 되어서 온갖 하자를 다 만난 것 뿐이다. 사는 동안 다 교체됐으니 다음 세입자는 다시 무난하게 살았을 것이다. 어느 날은 주인아저씨가 아랫집 내방까지 다 들리게 부인에게 소리쳐서 서러웠다. “전세 살면서 안 고치고 살 거면 당장 집 빼라고 해!” 너무 서럽고 하자가 많았지만 집을 구하는 것도 이사 다니는 것도 힘드니 그냥 살았다.


그러다 지쳐서 집을 빼기로 했는데 이사 올 때부터 문제였던 싱크대 배수가 발목을 잡았다. 그동안 여러 시도를 해보아도 안 돼서 물 한 번 쓰면 물이 천천히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갑자기 꽉 막힌 듯 내려가지 않았다. 이제까지 불편하게 살았는데 하필 집 빼려고 결심한 날 문제를 일으켜 어쩔 수 없이 업자를 불러야 했다. 싱크대를 들어내고 바닥 배수구에 기계를 넣어 막힌 원인을 찾는데, 기가 차게도 방바닥 아래 배관에서 돌돌 묶인 검정 비닐봉지가 나왔다. 썩지도 않는 비닐이 막고 있으니 수년동안 배수가 안되는 건 당연했다. 과거 세입자의 소행인 듯싶은데 일부러 넣기도 어려운 봉지 덩어리가 어떻게 저 아래까지 갔는지 어이가 없었다. 내 잘못도 아니고 집주인이 해결해 주지도 않아서 내내 불편하게 살았는데 결국 내가 해결하고 나가게 되었다. 나가는 날까지 잔금을 받는 문제로 애를 먹여서 사정사정하고 케이크까지 사다 바치며 비위를 맞췄다. 오랜 세입자 생활에서 본 최악의 집주인이었다.




꿈 얘기하다가 과거 탐험이 길어졌다. 대체로 무난한 집주인을 만나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줬는데 가장 많은 하자가 생긴 집에서 해결해 주지 않았던 집주인을 꿈에서, 그것도 같은 집에서 만나 당황했다. 하필 같은 현관을 쓰는 집이라니. 무의식과 현재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는 꿈은 내 걱정을 보여준다. 이사를 하고 싶은데 몸 상태는 안 따라주는 상황에서 이사해도 또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 몸 상태가 나빠져서 이사 자체에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는 염려가 드러나 있다. 타로에서 심란했던 마음과 연결되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스트레스받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고 안쓰러웠다. 좋은 집주인도 많았는데 하필 가장 기억하기 싫은 사람을 꿈에서 보다니. 집주인을 보고 순간 당황하고 잘못된 결정이라 생각했지만 이미 겪어본 사람이어서 무섭지 않았고, 과거처럼 당하지 않겠다고 꿈속에서 생각했다. 현실이 힘든 상황인 것은 맞으나 나에게 헤쳐 나갈 의지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일단은 몸이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사를 결정할 수가 있으니. AI는 현실적으로 당장 이사가 힘들다면 지금의 집에서 환경을 바꾸는 방법을 추천해 줬다. 어느 방향으로 식물을 놓으라거나 어느 방향에 머리를 두고 자라거나 짐을 줄여보라 같은…. 그런데 제시한 것들 모두 이미 내가 하고 있는 방법이었다. 머리로 걱정하면서도 몸은 스스로 대안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현실이 녹록지 않지만 나는 나아지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음이 힘들어도 몸은 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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