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는 한마디도 몰라요
"이 비행기는 곧 에콰도르 키토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안전벨트를 꼭 매 주세요"라고 승무원이 말하는 것 같았다.
한국말도, 영어도 아닌 스페인어였다.
내가 못 알아듣는 말이 방송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창문 밖을 보니 비행기의 고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승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외할머니와 나는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람들 뒤를 따라 나갔다.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사람들이 서 있는 긴 줄 뒤에 같이 섰다. 입국장은 시골의 버스터미널보다 작아 보였다.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의 줄이 조금씩 줄기 시작했고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현지 직원이 날 힐끗 쳐다보며 뭐라고 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갸우뚱해하자 직원이 다시 나를 쳐다보며 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스페인어를 한마디도 못 알아 들었다.
다른 직원이 오더니 외할머니와 나를 줄 밖으로 세웠다. 뭔가 이상했다. 안 되겠다 싶어서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영어단어를 마구 내뱉었다. 이 공항에서 나가야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말이 안 통하니 너무 답답했다. 누가 내 말을 통역해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사람들이 나가는 방향을 가리키며 우리도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손짓했다. 직원들은 난감해하며 나를 막았다.
사람들로 가득 찼던 입국장에는 결국 우리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전기를 든 직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까 내렸던 비행기를 가리키며 빨리 같이 가자고 재촉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타고 온 비행기가 착륙장에 그대로 있었다.
"설마 우리가 잘못 내린 건가?"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나는 외할머니 손을 꽉 잡고 비행기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비행기에 오르자 앉아있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가뿐 숨을 가다듬으며 자리에 앉았다. 마침 복도 건너편에 어떤 여자분이 앉아있었다. 나는 창문 밖을 가리키며 "NO QUITO?"라고 물어봤다. 여기가 키토가 아니에요?라는 의미였다.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콰도르를 향해 출발할 때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경유를 했었다. 당시 외할머니와 나는 미국 비자가 없었다. 그래서 뉴욕에 도착하자마 공항직원이 우리 여권을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우리 여권은 에콰도르행 비행기의 승무원에게 전달이 되었다. 키토에 도착하면 여권을 돌려받아야 했는데 승무원은 우리가 과야킬에서 내리는지도 몰랐던 거였다.
태어나서 비행기를 처음 타 본 나는 여권이 있어야 입국을 할 수 있는 것도 모른 채 그냥 비행기에서 내렸던거였다. 서류도 없이 도착한 나를 보고 공항직원들도 황당했을 수밖에.
미국에서 비행기를 탈 때 바로 키토에 도착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비행기는 과야킬이라는 다른 도시에 먼저 들렸던 거였다.
다시 비행기를 탄지 얼마 안 되어 창문 밖으로 안개에 낀 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방송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또다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까 물어봤던 그 여자분께 "Here Quito?"라고 물어봤다. 여기가 키토인가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에콰도르 키토에 도착했다.
스페인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