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미디어: 책
제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Nesnesitelna lehkost byti)
지은이: 밀란 쿤데라 (Kundera, Milan)
번역: 이재룡
출판사: 민음사
출간연도: 2018
원문 출간연도: 1984
페이지: 507p
군대에 있을 때 굉장히 친했던 동기가 한 명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이상한 동기였지만 같이 대화를 하다 보면 생각이 매우 깊다는 걸 많이 느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자기가 읽고 있는 책이 너무나 재밌고 내용이 훌륭하다고 나에게 추천해줬다. 그 책이 바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처음부터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해 말하며 우리는 무얼 택해야 하는지 물어본다. 그리고 각각의 인물들의 인생을 보여주며 무엇이 옳은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책을 아무리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제목을 이해하게 된다면 책을 이해한 것이라고 하니 차근차근 제목의 의미를 되짚어 보려고 한다.
가벼움이란 무엇일까?
우리 인생의 매 순간이 무한한 횟수로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다. 이런 발상은 끔찍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저자는 무거움은 영원회귀라고 정의한다. 니체가 주장한 영원회귀는 우리의 인생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사상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다음 생에서도 똑같은 행동을 하기에 지금 살아있는 매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영원회귀에서 우리의 몸짓 하나하나가 책임의 짐을 떠맡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는 너무 끔찍하다고 한다. 반대로 영원회귀를 거꾸로 생각해 본다면 단 한 번뿐인 인생은 한 번 지나면 돌아오지 않아 잔혹하던 아름답던 의미가 없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가볍다고 칭하고 있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무거울수록 삶이 생생 해지지만 너무나 막중한 책임을 떠안고 가벼울수록 자유로워지지만 의미가 없어진다. 무거움과 가벼움은 서로 정반대 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존재의 가벼움?
존재란 살아있는 우리들을 뜻한다. 저자는 왜 존재의 가벼움이란 단어를 골랐을까? 존재란 가벼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까?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살아있단 건 가벼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결국 의미가 없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가벼움을 버리고 무거움을 추구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저자는 네 명의 인물의 인생을 보여준다. 각각의 인물은 가벼움과 무거움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고 가벼움과 무거움은 서로 충돌하며 이로 인해 생기는 갈등과 고민들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무거움은 가벼움을, 가벼움은 무거움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토마시는 테레자를 만나고 사랑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가벼움이 무거움으로 바뀌었다.
테레자는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사랑을 갈망하게 된다. 가벼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거움을 갈망하는 것이다.
사비나는 토마시와 테레자가 오랫동안 사랑하다 죽었다는 걸 듣게 되고 문득 프란츠가 그리워졌다. 가벼움이 무거움을 바라고 있다.
프란츠는 무거움의 대표 격인 키치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무거움이 가벼움을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존재는 가벼움인가 무거움인가
그래서 뭐가 정답일까? 모두의 인생이 그럴듯하다. 도대체 존재는 가벼움이랑 무거움 중 뭘 택해야 할까? 참, 우리는 또 하나의 등장인물을 잊고 있었다. 바로 토마시와 테레자가 기르던 개 '카레닌'이다. 카레닌 또한 존재이므로 가벼움과 무거움 중 무언갈 택해서 살고 있을 터다. 카레닌에 대해 살펴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두 사람은 개를 바라보며 비록 시한부 생명이지만 카레닌이 웃는 동안에는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중얼거렸다.
카레닌은 죽기 직전까지 늘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행동을 한다. 카레닌은 매번 같은 일상을 반복했고 이는 영원회귀와 닮아있다. 그렇다면 카레닌은 무거움 속에서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과연 무거운 삶을 살아서 웃을 수 있었을까? 영원회귀의 삶을 다시 생각해보자. 영원회귀에 의하면 우리는 수많은 삶을 살았고 그 삶의 탄생과 죽음의 순간은 이미 정해져 있다. 존재는 죽음이 이미 예언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비극 속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카레닌은 도대체 왜 웃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존재의 가벼움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생이 비극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찰나의 반짝임들, 그 가벼움들이 만들어내는 행복들 때문에 우리는 생을 이어 나갈 수 있다. 존재의 가벼움이 존재의 무거움을 견디게 한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것을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의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우리가 한없이 가볍기 때문이다. 카레닌도 그렇다. 무거움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이 유일하다는 가벼움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벼움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가벼움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으니.
쉽게 비유해보자면, 학교를 다니거나 회사를 다니거나 각자의 일상이 있을 것이다. 매일이 반복되며 일상의 시작과 끝은 정해져 있다. 이런 일상을 매번 반복하기에는 너무나 끔찍하다. 아마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무거움은 비극이다. 하지만 존재는 한 없이 가볍다. 그래서 가끔씩 친구와의 술자리나 여행 같은 가벼움들이 우리의 일상을 지켜준다. 그러나 일상 없는 일탈은 결코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일상이 없으면 일탈이란 용어도 없을 것이다. 무거움 속에서 가볍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그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밀란 쿤데라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도 무겁기 때문에 우리는 가벼움을 참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가벼움이 만들어내는 찬란하고 행복한 순간이 있기에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니체도 영원회귀에 의하면 매 순간은 순간이 아닌 영원이 되므로 그 순간을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즐기라고 했다.
우리 대부분 바쁜 일상에 치여 살고 있다. 그래서 친구와의 만남이나 여행, 나만의 시간 등 소중한 순간들을 잊고 살아갈 때가 종종 있다. 슬픔이라는 빈 공간만 있을 뿐이다. 잠깐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이 순간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우리는 가벼움을 참을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