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국가가 되는 세계, 사이버 펑크가 그리는 현대의 불안 (1부)
당신의 몸이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면,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가?
돈이 있다면, 당신은 인간을 넘어설 수 있다.
돈이 없다면, 당신은 인간조차 될 수 없다.
여기, 그 불안을 세계관으로 만들어버린 작품이 있다. 바로 CD Projekt Red의 게임 <사이버펑크 2077>, 이를 원작으로 제작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다.
사람 몸에 칩을 꽂고, 온몸에 임플란트를 심고, 기업이 국가보다 강해진 세상. <사이버펑크: 엣지러너>가 그린 세상은 '과장된 현재'에 가깝다.
당신도 한 번쯤은 데이비드처럼 '더 강하고, 더 빨라지고 싶고, 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품어봤거나, 기술이 자본과 결합했을 때 소수만이 그 혜택을 독점하고 다수는 더 치열한 경쟁 속으로 밀려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나이트 시티는 그 욕망과 불안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구현되고,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감각으로 전달하는 도시다. 그렇기에 엣지러너는 미래가 아닌 현재의 이야기다.
�️ 모든 것은 애니판 <사이버펑크: 엣지러너>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나이트 시티에서 태어난다는 건 선택권이 없다는 뜻이다. 이 도시는 국가가 다스리지 않는다. 기업이 다스린다. 법도, 군대도, 의료도, 교육도 전부 기업의 손에 있다. 국가의 복지나 윤리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이 도시에서 합법적으로 성공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아라사카 타워의 꼭대기 층에 올라가는 것. 나는 나이트시티에 태어났고 어머니는 내가 성공하길 원했다. 가난한 형편에도 내가 아라사카 아카데미에 다닌 이유는 그곳이 꼭대기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나이트시티에서 인간의 몸은 기본 사양이다. 인간의 모든 신체는 개조되고 업데이트된다. 강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달아야 하는 것. 사람들은 이것을 임플란트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이버웨어(신체 개조)에는 대가가 있다. 가속되는 것은 임플란트일뿐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체가 한계에 다다르면 사이버사이코시스라는 부작용이 덮쳐온다.
나는 글로리아가 남긴 군사용 산데비스탄을 이식했다. 신경을 강제로 가속시켜 시간을 훔치는 장비. 일반인이라면 한 번만 써도 신경이 타버렸겠지만, 내 몸은 기이하게도 산데비스탄의 속도를 견뎌냈다. 하지만 가속된 세계에서 머무를수록 내 정신은 점차 균열이 생기고 일그러졌다. 지금 비명을 지르며 부서지고 있는 건 임플란트가 아니라 '나'다.
아라사카 학원을 관두고 싶다는 내게 글로리아는 "... 그럼 난 무엇을 위해서?"라고 되물었다. 날 향한 질문이 아니었기에 멈추라고 할 수 없었다. 현실보다 가상현실이 더 익숙할 루시는 날 브레인댄스(BD) 속으로 데려갔다. 가짜 하늘을 날아 도착한 황량한 달 표면 위에서도, 루시는 "달에 가고 싶다."라고 했다.
나는 두 사람의 꿈에 이유를 묻는 대신, 그 꿈들을 내 것이라 여겼다. 내 안의 빈자리에 타인의 열망을 산데비스탄처럼 박아 넣었다.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나를 계속 움직이게 했다. 불안은 이유를 묻지 않았고, 멈춰야 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메인이 죽고, 엣지러너를 이끌기 위해 내 몸을 계속 개조했다. 임플란트가 늘어날수록 몸은 무너졌지만 계속 같은 말을 되뇌었다.
나는 버틸 수 있다.
나는 특별하다.
몸이 보내는 불협화음에도 멈추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한계에 다다르고서야 나는 특별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자각은 했었다. 늦은 건 자각이 아니라 인정이었다.
루시는 아마 달에 갔을 것이다. 나는 함께 가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애초에 그건 내 꿈이 아니었으니까.
"Your Life is worth it! (당신의 인생은 가치가 있습니다!)" ㅡ Trauma Team International
위의 슬로건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의료 서비스 업체 '트라우마 팀'의 슬로건이다. 이들은 보험 가입자들의 구조 신호를 받으면 빠르고 신속하게 이들을 보호하고 이송한다. 반면, 보험자 가입자가 아닌 데이비드와 글로리아 모자에게는 가벼운 응급조치도 없이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트라우마팀뿐만이 아니라 이곳의 경찰은 기업에게 고용당한 용역이고, 돈이 없는 사람에게 의료 기관은 민간 의사인 리퍼닥보다 신뢰받지 못한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의 작품 속 배경인 나이트시티는 극단화된 자본주의 실험장이다. 돈만 있다면 인간 이상의 신체와 삶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없다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 이 도시에서 법은 기업 계약이, 정의는 수익성이, 인간은 교체 가능한 부품이 된다. 그렇기에 멈추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과부하에 걸리면 사이코라는 비정상이 되며, 멈추면 폐기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의 몸에 이식된 건 신체 강화 장치가 아니라 특별하다는 감각이다. 산데비스탄을 이식한 이후 데이비드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다. 루시를 만났고, 엣지러너 크루에 합류했고, 처음으로 이 도시에서 존재감을 느꼈다. 때문에 데이비드는 이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두려움보다 특별함을 상실하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실제로 데이비드는 산데비스탄이 없었다면 나이트시티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이트 시티는 돈이 없는 자에게 무엇도 보장하지 않고, 최소한의 보호도 하지 않는다. 설령 데이비드가 산데비스탄을 이식하지 않고, 아라사카 학원을 다녔더라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는 아카데미의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을 거고, 졸업하더라도 아라사카 꼭대기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라사카에 착취당하는 길밖에 없다.
그렇다면, 데이비드가 사이버사이코시스가 오기 전에 산데비스탄을 제거했더라면 결말은 달라졌을까? 그 답은 데이비드가 무엇을 위해 달렸는지를 먼저 묻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무엇을 위해 달렸을까. 루시와 달에 가기 위해서였을까?
이 애니메이션의 대표 명장면은 자신의 파멸을 확신한 데이비드가 루시에게 “함께 달에 가지 못해서 미안해”라고 말하는 장면일 것이다. 데이비드는 어머니를 위해 아라사카 아카데미에 다녔고 루시를 위해 달여행을 알아본다. 데이비드의 욕망은 이 둘의 꿈을 이뤄주는 것이었을까? 최후의 순간에 데이비드는 달에 가지 못한 것을 후회했을까?
안타깝게도 데이비드를 움직인 것이 타인의 꿈이 아니었다. 이는 데이비드가 아라사카 꼭대기와 달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 수 있다.
데이비드가 진짜 어머니 글로리아를 위해 아라사카 꼭대기에 가고자 했다면, 글로리아가 죽은 직후 카츠오를 패서 퇴학당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시의 꿈이 우선이었다면, 큰돈이 생기는 순간 달 여행 티켓을 끊었어야 했다. 물론 메인의 죽음으로 엣지러너를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를 멈출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데이비드에게 메인의 죽음은 사이버사이코시스라는 트라우마와 공포인 동시에, 리더라는 책임감이 포장한 특별함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즉, 데이비드를 움직인 것은 ‘특별함’이라는 욕망이자, 이를 상실한다는 불안이다. 욕망과 불안은 서로의 거울이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착취하고 서로를 가속화시킨다.
이 지점에서 비극이 발생한다. 데이비드와 루시는 서로를 사랑했고 같은 목표를 골랐지만, 서로의 불안을 공유하지 않았다. 불안이 공유되지 않는 욕망은 서로를 이해시킬 수 없다.
데이비드에게 산데비스탄을 제거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데이비드에게 산데비스탄을 제거한다는 것은 나이트시티에서 스스로를 지우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트시티가 진정으로 두려운 이유는 강요하지 않기에 모든 것은 선택의 결과라는데 있다. 그 누구도 데이비드에게 산데비스탄을 제거하지 말라고, 임플란트를 업그레이드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선택으로 산데비스탄을 이식했고, 몸을 개조했고, 최후의 순간까지 버텼다. 그 결과 그는 도시의 전설로 남았고 모든 것을 잃었다.
데이비드가 오해한 것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착각만이 아니다. 그는 타인의 욕망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글로리아가 그를 아라사카 꼭대기에 보내고자 했던 것과 루시가 달에 가고자 했던 욕망에는 두 사람의 불안이 투영되어 있다. 그 불안은 아라사카 꼭대기층에 가지 않고도, 달에 가지 않고도 덜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완벽한 해결의 방법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현대인에게 불안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것이기에 그것을 완전히 제거할 방법은 없다. 개인을 소모하는 것으로 불안을 끝낸다는 전제가 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엣지러너(Edgerunner)와 달
엣지러너(Edgerunner)는 ‘경계 위를 달리는 사람’라는 뜻이다. 작품 속 인물들에게서 익숙한 감각을 느끼는 이유는 현대인들이 이미 경계 위를 달리기 때문이다. 엣지러너는 단순히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의 비판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욕망과 불안을 동시에 꿈꾸기 때문에 스스로를 속이고 착각한다.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욕망을 묻는 동시에 무엇을 불안해하는지도 질문해야 한다. 삶과 죽음이 한통속이라 우리를 속인다면, 그 거짓말의 방식은 욕망과 불안이라는 형태다.
아라사카라는 불안에서 벗어난 루시는 원하던 달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곳의 루시는 꿈을 이룬 자가 아니라 텅 빈 생존자에 불과하다. 그 뒷모습을 보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지금 무엇을 향해, 어디로 달리는가?
� 네온 이후의 기술들 —『사이버펑크의 기술 계보』
: 사이버펑크 작품들이 그려온 욕망의 역사 (아키라 · 공각기동대 · 블레이드러너 · 사이코패스 VS 엣지러너)로(2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