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는 문장들 ㅡ ⟪센티멘탈밸류⟫

기만하기보단 상처를 택하는 이들에 대하여, 재현이라는 화해

by 해월

'나'를 통해 자신을 비춰보는 부모는 높은 확률로 자식에게 밉다. 그 미움은 나의 예민함을 품고 있다. 남에게 들키기 싫은 자존심, 시절에 멈춰버린 감수성 같은 것들 말이다. 미워하는 것은 소중히 여기는 것을 품고 있다. 그렇기에 미워하는 존재는 나와 닮아있고, 나를 통해 자신을 보는 부모는 높은 확률로 일부 옳다. 그 일부분은 서로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는 역린일 테다.




보편적인 부모 자식 관계란 이러한 역설을 품고 있기에, 사과와 용서를 쉽게 비껴가기 마련이다. 여기, 그 흔한 사과와 용서의 과정 없이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 화해에 다다르는 부녀가 있다. 바로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영화 <센티멘탈 밸류>의 주인공들이다.

모든 보편적인 이야기가 쉬운 공감을 얻지는 못한다. 하지만 <센티멘탈 밸류>는 익숙한 소재 안에서 인물들을 충돌시키고, 영화라는 예술을 경유해 서로에게 도달하게 한다. 관객은 '구스타프'와 '노라'의 영화적 재현을 통해 서로의 역린을 마주하는 과정을 목격한다.

이번 글에서는 <센티멘탈 밸류>가 제시하는 '영화라는 예술'이 어떻게 화해의 방법이 되는지, 흔한 사과와 용서의 언어 없이도 서로의 존재에 도달하는 과정이 어떻게 스크린 너머의 관객의 사적인 기억마저 건드리는 체험이 되는지를 풀어보고자 한다.



영화라는 예술이 우리를 화해시키는 행위


<센티멘탈 밸류>는 무대 공포증에 떠는 노라와 곧이어 '집'에 관한 어린아이의 에세이의 회상으로 시작한다. 아이의 목소리는 집을 살아있는 존재로 상상한다. 사람들이 가득 찰 때 집은 더 행복한지, 창문이 세게 닫힐 때 고통을 느끼는지. 사람들의 소음에 익숙해진 집은 침묵을 싫어하는지. 영화는 그렇게 집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을 축적하고 기억을 품는 장소로 제시한다. 훗날 노라는 그 에세이를 드라마 스쿨 오디션 낭독문 후보로 다시 꺼내 보지만, 결국 체호프의〈갈매기〉속 니나의 독백을 택한다.


관객은 이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집'이라는 공간이 심어준 시간의 잔향에 주목하며, 이후 구스타프의 각본에도 등장하는 집을 통해 '집'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 그 안에 살았던 이들의 역사가 담긴 공간으로 인식한다.


중요한 것은 이 집이 단지 기억의 배경이 아니라, 그 안의 사람들을 닮아 있다는 점이다. 집이 침묵을 견디지 못하듯, 이 영화의 인물들 역시 침묵과 말 사이에서 끝내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한다.



기만하느니 상처를 택하는 미련함을 지닌 이들

그런 사람들이 있다. 기만하느니 상처를 택하는 이들.
맘 편하라고 포장된 좋은 말을 하느니 스스로에게든 타인에게든 상처주길 선택하는 미련함을 지닌 이들.

사람들은 저마다의 예민함을 갖는다. 스스로의 예민함을 마냥 좋아하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어쩌면 이 지점이 구스타프와 노라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문장일지도 모른다. 구스타프와 노라는 상처를 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기만적인 위로를 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아서 상처 주는 것이 아니라, 취약한 감정을 직접 말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사실과 판단의 언어만 남긴다. 그래서 이들의 대화는 서로에게 미운점만을 봐서 혹은 일방적이라서 실패하는 것이 아닌, 둘 다 스스로의 감정에 지나치게 방어적이라 실패한다.


노라는 스스로가 되기 싫어하는 사람이다. 무대 위에서는 타인을 연기하지만, 자기 자신으로 남는 순간을 견디지 못한다. 얼핏 봐서는 단단하고 당당해 보이지만 엉망진창인 80%의 모습 대신 20%만 보여주는 것을 택한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지만, 기만하는 것은 더 싫기 때문에 차라리 혼자가 되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 그것이 노라가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이자, 구스타프와 노라의 대화가 끝내 어긋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스타프가 레이첼에게는 보여줄 수 있었던 이해와 존중을 노라에게는 끝내 보여주지 못한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노라를 하나의 타인으로 보지 못한다. 너무 많이 자신과 겹쳐 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닮음 때문에, 구스타프의 각본은 처음부터 노라를 향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구스타프는 왜 노라에게 주연을 제안했을까?

영화 속 구스타프의 각본은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어머니 '카린'에 관한 자전적 복귀작이다. 이 각본은 나치 점령기 고문 트라우마를 겪은 어머니가 결국 가족의 집에서 자살에 이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각본을 읽은 이들은 단순히 '카린'의 이야기로만 읽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노라를 읽어낸다.

그렇다면 구스타프는 처음부터 노라와 화해를 염두에 두고, 노라를 떠올리고 각본을 쓴 것일까? 아니면 어머니 '카린'에 대해 쓰기 시작했지만, 과정에서 노라의 이야기가 된 것일까? <센티멘탈 밸류>의 특별한 지점은 트리에 감독이 해당 부분을 해석의 영역으로 열어두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은 노라가 거절한 각본을 읽게 된 레이첼과 구스타프의 대화, 그리고 트리에 감독의 인터뷰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대본을 리딩하는 레이첼은 구스타프에게 '이 여자가 자살을 결심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에 구스타프는 레이첼에게 스스로 해석을 찾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Well, that’s the question the film is asking, isn’t it? I think you have to find your own reason.
그게 바로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잖아. 네가 네 이유를 찾아야 해.

이 대답은 단순히 감독으로서 배우에게 연기 방향을 지시하는 행위로만 보이지 않는다. 레이첼이 '당신 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에도 구스타프는 "이건 내 어머니에 대한 게 아니다."고 선을 긋는다. 그는 끝내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질문을 비껴나가며 어딘가 방어적으로 보인다.


물론 이 이야기가 결국 노라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트리에 감독은 '구스타프의 영화가 그의 어머니와 딸, 그리고 구스타프 자신 모두에 관한 것'이라 설명한다. 또한 스텔란 스카르스고르의 인터뷰 또한 '구스타프가 자기 각본을 의식적인 소통 수단으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딸을 그 안에 투사하고 있다'고 밝힌다. 이 점을 고려하면, 구스타프가 처음에는 어머니를 염두에 두고 각본을 쓰기 시작했을 가능성을 열어볼 수 있다.


영화 곳곳에서 구스타프는 딸 노라에게서 자신을 투영하는 듯한 뉘앙스를 반복해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스타프는 처음 어머니에 대해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노라와 아그녜스가 아버지인 그를 온전히 알지 못했듯, 그 역시 직접 어머니가 되어 각본을 집필하며 어머니의 감정을 마주하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는 과거의 어머니와, 동시에 어린 시절의 자신과 화해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구스타프는 각본 속에서 자신과 계속 겹쳐 보였던 노라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렇게 이 각본은 그의 어머니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구스타프 자신의 이야기 그리고 노라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아버지는 노라의 자살시도를 눈치챘었을까?

누군가 그러더군요. 기도는 신에게 말을 거는 게 아니라, 절망을 인정하는 거라고요.
도와주세요. 이제 더는 못 하겠어요. 혼자서는 못 하겠어요. 나에겐 집이 필요해요. 집이 있어야 해요.

아그녜스는 각본을 읽다가 노라를 떠올리고 그 대사를 노라에게 읽어보라고 건넨다. 노라는 그 문장을 읽으며 각본 속 인물의 대사가 아닌 자신의 말처럼 느낀다. 아그녜스와 노라는 서로를 끌어안으며 묻는다. '아버지는 노라가 자살하려던 걸 눈치챘던 걸까?' 이 부분 역시 영화는 답을 끝내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추측에 앞서 우리는 먼저 하나의 질문을 풀어봐야 한다. 왜 이 대사가 노라의 이야기처럼 읽혔을까?


구스타프와 노라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예민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실의 언어로밖에 소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있다. 구스타프가 노라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는 구스타프가 스스로를 미워하는 부분이자, 노라가 스스로를 어떻게 상처 입힐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구스타프가 노라의 자살 시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보다는, 노라의 아픔을 어느 정도 감지한 것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 안에서 노라의 고통이 생각보다 깊다는 사실 또한 감지했을 것이다. 이 우연으로 인해 노라는 자살까지 몰아갔던 과거의 자신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순간들은 기쁨, 슬픔, 우울, 감동 같은 감정의 이름표이기보단 '더는 못 하겠어', '혼자서는 못 하겠어.' 같은 문장에 더 닮아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노라에게 필요했던 건 위로라는 감정의 언어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있던 독백을 제3자의 시선으로 다시 듣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에 멈춰있던 자신과 마주한 노라는 어쩌면 조금씩 스스로와 화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라가 영화 출연을 결심하게 된 이유 역시 영화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려는 움직임에 가깝다. 과거의 자신을 더 이상 혼자두지 않기로 했기에, 비로소 노라는 구스타프와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구스타프와 노라가 닮은 것은 상처를 택하는 미련함만이 아닐 것이다. 두 사람의 닮은 점은 이야기가 아닌 문장에서 드러나는 감정의 흐름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어떻게 우리를 화해시키는가.

영화 후반부, 노라와 구스타프는 함께 담배를 태우며 서로를 바라본다. 이는 노라가 구스타프에게 오랫동안 품어왔던 감정의 응어리가 어느 정도 해소되었음을 암시한다. 길게 이어지는 대화도, 사과도, 용서의 말도 없이, 둘은 영화를 통해 화해의 지점에 도달한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이 생긴다. 왜 하필 영화인가라는 질문이다. 영화는 단순히 부녀의 화해가 일어나는 배경이 아니다. 이들에게 영화는 거의 유일하게 감정을 다룰 수 있는 언어다.


구스타프와 노라에게 대화는 지나치게 직접적이다. 노라는 커피숍에서 구스타프에게 말한다. '우리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구스타프는 노라에게 대화를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이들은 '내가 미안했다.', '사실 외로웠다.', '나는 상처받았다.' 같은 취약성 문법을 견디지 못한다. 반면 영화는 그것을 우회한다. 인물, 세트, 프레임, 장면, 재연을 통해 감정을 직접 고백하지 않고도 배치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 후반부에서 가족의 집은 세트로 재구성되고, 노라는 그 재현된 공간 안에서 촬영을 마무리한다. 촬영이 끝난 이후에도 노라는 잠시동안 무언가를 오래 생각한다.


이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들에게 화해는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재현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고백할 수 없는 이들은 기억을 프레임으로 다시 배열하며 그것을 장면으로 만들고 서로를 이해한다.


이들을 지켜보는 관객은 스크린 너머로 다시 자신에게 돌아가게 된다. <센티멘탈 밸류>는 우리를 과거로 돌려보낸다. 한때 스스로와 마주 볼 수 없었던 시간들로.


Sentimental Value : 기억을 다시 찍는 일

나에게만 소중한 줄 알았던 예민한 것을 상대가 품고 있다는 건 그런 것이다.
용서 없이도 이해해버리고 마는 것, 말하지 않고도 눈치채버리고 마는 것

영화관을 나오면서 썼던 메모다. 고작 나의 이야기가 아닌데도, 지난날의 나를 경유해 가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런 이야기들이 지나가는 것은 대게 내 경험 자체라기보다, 내 안에 잔재하는 그때의 응어리다.


좋은 아버지라고 말하기 힘든 구스타프가 작중에서 미웠던 적이 단 한 번 있다. 레이첼에게 사과했을 때다. 노라에게는 기만하기보단 차라리 상처주는 방식을 고르면서 레이첼에겐 이해와 존중을 보여주는 모습이 아주 잠시 미웠다. 구스타프가 노라를 마냥 응원하지 못하는 이유가 노라를 자신과 겹쳐보기 때문에, 구스타프 또한 스스로를 기만하기보다 스스로를 상처 주는 사람인 걸 알아서 더 미웠다. 그리고 각본을 읽는 노라가 눈물을 흘릴 때, 서로만 읽을 수 있는 문장이 읽히는 순간, 나 역시 구스타프와 화해했다.


감정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어떤 감정들은 기억과 함께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 혹은 기억조차 희미한 순간을 대신해 자리한다. 예술은 그런 순간들을 우리 앞에 다시 재현해 놓는다. 그 재현을 통해, 한때 지나쳐버렸던 자신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감상하는 관객에게 보편적인 감정 속에서 우리를 화해시킨다. <센티멘탈 밸류>는 영화를 찍는 행위, 배역을 연기하는 행위 그 자체가 화해의 과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영화인들만의 화해의 방식은 아닐 것이다. 기억을 다시 재현하는 시도, 그리고 그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예술은 누구에게나 화해의 언어가 될 수 있다.


영화관에서 우는 경험은 내게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런데 <센티멘탈 밸류>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내 주변에서도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로의 감정을 자기변명의 도구로 삼고 싶지 않아 외면했던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은 설움이 되고, 영화를 통해 재회하게 되었다. 함께 훌쩍였던 이들도 나와 같이 재회의 순간을 맞이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센티멘탈 밸류>는 우리에게 스스로의 예민함을 돌아보게 한다. 그것이 시장 가치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내게는 소중한 애착 이불처럼. 나의 예민함은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지키기 위한 다정함이기도 하다.


그래서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기 자신이 있는 사람들, 그런 두려움이 잔재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영화를 통해 스스로를 조금은 용서해 주길 바란다. 당신의 예민함은 미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소중히 여겼던 것과 그것을 지키려는 다정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함께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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