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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Jun 24. 2023

소금단지

용서


형과 동생이 디지게 싸웠습니다.  그것을 보고 엄마가 말했습니다.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성(형)이다.”


역시 한 살이라도 더 먹은 형이 먼저 손을 내밉니다. “야! 미안하다.”


아마도 동생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형의 스타일은 더욱 구겨졌을 것입니다. 동생은 원래 동생이니 동생이라는 말을 들어도 아무 상관없겠지만 형은 ‘동생’이라는 말을 들으면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형이다”는 말은 사실 형이 먼저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옛 우리 어른들은 ‘용서’에 대한 교육도 참 지혜롭게 잘했던 것 같습니다. - 최용우



용서라는 말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구약성경에서는 용서와 관련하여 세 개 단어가 쓰였습니다. "나사", "살라흐", "카파르"였습니다.


우선 "나사"라는 말을 살펴보면 "나사"(נָשָׂא)는 옮기다, 제거하다, 치우다는 본래 의미를 바탕으로 죄, 악, 과실, 부정을 없앤 상태를 의미합니다.(창세 50, 17; 탈출 32, 32; 호세 14, 2; 시편 25, 18)


'나사'는 "죄/허물"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여 죄를 생각과 감정, 그 처벌로부터 치워버림으로 "용서하다"의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살라흐"(סָלַח)는 대체로 하느님이 주어로 사용될 때, "용서하다"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또 "카파르"(כָּפַר)라는 말은 "속죄하다", "덮다"(레위기)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즉 구약성경에서 용서의 의미는 죄를 옆으로 치워놓거나, 덮어주거나, 혹은 가린다는 의미였습니다.


한편 신약에서 '용서'는 아페시스(ἄφεσις); 파레시스(πάρεσις)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파레시스’라는 말이 ‘빠뜨림’ 또는 ‘넘어감’(마태 6, 14-15), ‘지움’(로마 3, 25; 4, 25)의 의미로 쓰였다면.


아페시스는 죄의 ‘사면’(마태 26,28; 마르 3, 29; 사도 5, 31), 죄의 ‘탕감’(마태 6, 12), ‘해방’(마태 9, 5-6)의 의미였습니다.


여기서 탕감의 뜻은 세금이나 부채 등을 남김없이 모조리 감(減) 해 주거나, 빚이나 요금, 세금 따위를 삭쳐주는 것 일컫는데요. 삭쳐주다는 의미는 장부에서 뭉개거나 지워서 없애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과 마르 2장에서 쓰인 '용서하다'라는 헬라어 동사 '아피에미'(ἀφίημι)는 '~로부터'라는 '아포'(ἀπό)와 '보내다'라는 뜻의 '히에미'(ἵημι)가 합성된 단어로 의미가 더 풍부해서 용서하다, 탕감하다는 뜻 외에 버려두다, 소홀히 하다, '떠나보내다', '당장 논의하지 않는다', '빚을 포기하다', '무시하다', '멀리 보내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죄를 범한 사람으로부터 죄를 멀리 보낸다는 뜻을 갖고 있지요.


특히 “이는 죄를 용서(아페시스; ἄφεσις)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 28); (마르 14, 22-26); (루카 22, 14-20); (1코린 11,23-25)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이는 죄를 사면, 탕감 (혹은 죄로부터 해방)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리는 말씀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


철학자 파스칼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고 또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굳게 믿는 죄인이다."


흔히 하는 말로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다"라고 하지요. 내 마음의  상처와 고통만 생각하고 남의 상처와 아픔은 돌아볼 마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남의 허물과 티는 보면서 내 안의 죄와 과오는 덮어두고 묻어두려 하는 것은 아닌지.


멀리 살고 있는 브라질 사람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은 가장 가까이 있는 부모 형제와 이웃이지요. 이들은 나의 원수(?)입니다. 내가 사랑을 실천해야 할 첫 번째 대상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 4,29.)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루카 6,31.)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나는 너한테 이만큼 해줬는데,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라는 말은 상대방이 나한테도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특히 서로 기대고 의지하는 관계일수록 내가 받고 싶은 만큼 상대방도 내게 받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정과 감정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충돌은 없을 수 없지요. 문제는 어떻게 충돌을 예방하고 최소화할 수 있는가. 또 어떻게 화해하고 해결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지혜로움과 덕이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


사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보이지 않고 남이 잘못한 것은 아주 크게 보이지요. 우리의 모습입니다. 모두 다 똑같지요. 모두 다 허물과 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청해야 할 것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기를.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어, 자비를 베푸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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