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피정 3막

0장. 영원한 삶

by 진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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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인간 존재에 내재한 영원한 삶의 의미와 그에 대한 갈망을 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영원한 생명과 부활 신앙의 핵심을 인식한다.

그리스도인의 죽음관을 통해 희망의 덕행을 배우고,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힌다.

현세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가꾸며, 영원한 삶을 미리 체험한다.




정화, 조명, 일치

우리 신앙의 여정은 정화(죄와 불의에서 벗어남)와 조명(진리의 빛으로 비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어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길 끝에는 영원한 삶, 곧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기쁨이 기다립니다.
교회는 인간이 단지 현세에만 머무르도록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영원하고 복된 삶을 향해 부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Gaudium et Spes, 18 참조]. 이 장에서는 ‘영원한 삶’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희망, 그리고 신앙인이 꼭 품어야 할 궁극적 희망을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 영원한 삶의 의미와 인간의 궁극 목적

인간 마음 깊숙이에는 ‘영원’을 바라는 갈망이 자리합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도 ‘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직감하는데, 이는 우리 안에 물질로 환원될 수 없는 불멸의 영혼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Gaudium et Spes, 18].


교회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이 세상의 고통 너머 복된 목적지를 향해 창조하셨으며, 그 궁극 목적은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라고 가르칩니다[Lumen Gentium, 2 참조]. 다시 말해, 하느님을 뵙고 그분과 온전히 하나 되는 삶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완성입니다.


초대 교회 교부 성 이레네오가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인간이며, 인간의 삶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S. Irenaeus, Adversus Haereses IV, 20, 7], 영원한 삶은 그저 시간이 무한히 흐르는 생존이 아니라, 지극한 행복과 충만함 속에서 하느님을 영원히 누리는 삶을 뜻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역시 천국을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이 충족되는 최고이자 궁극적인 행복의 상태”라고 정의합니다[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1024]. 이렇듯 영원한 삶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이며, 신앙인은 바로 그 희망을 붙들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영원한 생명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실재를 보여 주시고, 직접 약속해 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이라고 선포하시며, 당신을 믿는 이는 죽어도 영원히 살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활 동안 하느님 나라의 비유와 가르침을 통해 영원한 삶의 다양한 모습을 들려주셨습니다. 요한 복음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주셨다.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6)라고 밝혀, 영원한 생명이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약속을 결정적으로 입증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꺾고, 우리를 위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멸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드러내 보이셨다.”(2티모 1,10)라고 선포한 대로, 예수님 안에서 계시된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자, 하느님과 친밀히 결합된 삶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는 빛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통해 영원한 삶의 희미했던 부분을 분명히 보고, 그 빛으로 우리의 현재 삶을 비추어 보게 됩니다.




3. 죽음을 넘어선 생명: 그리스도인의 희망

죽음은 인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달리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능적으로 죽음을 거부하고 ‘영원’을 갈망하는 까닭은, 이미 우리 안에 영원한 씨앗이 심겨 있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Gaudium et Spes, 18].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셨기에, 우리의 죽음도 이제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건너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파괴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풍성히 베푸셨다”고 고백합니다[Gaudium et Spes, 22]. 그러므로 죽음은 그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희망 속에서 맞이해야 할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니, 예수님 안에서 죽은 이들도 하느님께서 데려오실 것”(1테살 4,14)이라는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길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은 삶의 여러 어려움과 고난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희망이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행복으로서 열망하도록 이끌고, 성령의 은총을 힘입어 흔들림 없이 신뢰하게 만든다”고 가르칩니다[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1817]. 죽음 너머에 있는 진정한 생명을 내다보는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현세의 삶조차 더 소중하고 가치 있게 만들며, 올바로 사랑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4.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 현세에서 맛보는 영원한 삶

영원한 삶은 결코 죽은 뒤에만 시작되는 ‘별개의 현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고 말씀하시어, 이미 현세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교회는 이 지상 순례의 여정을 걷는 중에도, 천상 예루살렘의 삶을 미리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특히 성찬례와 전례 생활을 통해 우리는 미리 하늘 잔치에 참여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에 대해 “지상의 전례에 참여하는 우리 또한 순례하는 동안, 하늘 예루살렘에서 봉헌되는 거룩한 전례를 미리 맛본다”고 가르칩니다[Sacrosanctum Concilium, 8].


성사와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형제적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이미 영원한 삶의 일부분을 현재에 살아내고 있는 셈입니다. 비록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이미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 속에서 성령 안에 사랑과 기쁨을 맛보는 순간들은 우리에게 천상의 행복을 예고합니다. 그 기쁨을 누릴수록, 우리는 더욱 영원한 삶을 사모하고 준비하게 됩니다.


정화와 조명의 여정을 걷는 우리의 영혼도 점차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로 나아가고, 그 완성은 마침내 영원한 삶에서 실현됩니다.




묵상코너

이 장에서는 영원한 삶을 주제로 몇 가지 묵상 거리를 제안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도: “주님,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향해 창조하셨고,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 전까지는 안식하지 못하나이다.” 이 고백을 차분히 되새기며, 우리 안에 자리한 ‘영원’을 향한 갈망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요한 계시록 21장: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환희가 담긴 성경 구절을 천천히 읽고,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살아갈지 결심해 봅시다.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 자각하기: “나는 이미 천상의 시민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영원의 관점에서 내 일상의 선택과 행동을 재정비해 봅니다.




정리합니다

영원한 삶은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하여 누리는 끝없는 행복으로, 인간 존재의 궁극적 목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계시하셨고, 부활 신앙이 우리의 영원한 삶에 대한 확고한 토대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희망의 관문으로 받아들이며, 이 희망을 통해 현세 삶의 고난을 이겨 낸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어 전례와 사랑 실천을 통해 현세에서 부분적으로 체험되며, 이는 미래에 완성될 영원한 행복을 미리 맛보게 한다.




알아둡시다

영원한 생명: 죽음 이후,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삶으로 최고의 행복과 충만함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이자 선물이다.

부활 신앙: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하여, 우리도 죽음을 넘어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한다는 믿음. 그리스도인의 희망 핵심이다.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상태로, 예수 그리스도로 이미 시작되었으나 영원한 삶에서 완성될 현실이다.

희망의 덕: 천주교 3가지 신학적 덕(믿음∙소망∙사랑) 중 하나로, 하느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굳게 바라며 신뢰하도록 돕는 성령의 은총이다. 역경 속에서도 결코 낙심하지 않도록 이끌어 준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 가르침이 앞으로의 신앙과 삶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이 땅에서 주님의 은총을 힘입어 영원한 행복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힘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십니다.




아. 참! 어떤 질문들


문1. “영원”이라는 개념을 인간 이성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답: 엄밀히 말해 유한한 인간의 이성만으로 ‘영원’을 완벽히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인류는 오래 전부터 무한, 절대자, 본질적 실재 등을 사유해 왔고, 이러한 시도가 영원에 대한 ‘어렴풋한 이해’를 돕습니다. 즉, 논리적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직관과 상징을 통해 영원을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문2. 영원한 삶이 인간의 ‘궁극적 선’(Summum Bonum)이라면, 왜 현재의 불완전함은 필연적일까요?
답: 우리는 모든 사물에서 완전함을 갈망하지만, 실제 세상은 유한성과 결핍이 공존합니다. 이 결핍이 오히려 영원을 향한 갈망을 일깨우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참된 선’을 인식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문3.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이 이 땅의 현실 문제들을 외면하게 만들지는 않을까요?
답: 오히려 진정한 영원성에 대한 인식은 현실을 더 소중히 여기도록 이끕니다. 철학적으로 이상세계(유토피아) 관념이 현실 개혁의 동력이 되었듯, 영원한 가치에 대한 열망이 현세의 가치와 삶을 더 의미 있게 가꾸게 만듭니다.


문4. 시간이 없는 ‘영원’의 상태에서 개인 정체성은 어떻게 유지될까요?
답: 시간은 존재 변화를 담는 그릇이지만, 영원은 변화가 아니라 ‘완전한 현재성’(eternal now)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정체성은 물리적 시간 속에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존재가 지닌 본질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 유지된다고 보는 것이 신학적 관점입니다.


문5. 물질적 세계에서 벗어나 ‘영원’을 말할 때, 몸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답: 고대 이원론처럼 ‘몸=악, 영=선’으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신학에서 부활은 ‘몸의 회복’을 강조하며, 물질성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다만 이 몸은 ‘영광스러운 부활체’로 새롭게 변화되어 영원한 차원에서 완성된다고 믿습니다.


문6. 모든 종교·문화권에서 영원한 생명을 꿈꾸는데,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답: 다양한 전통이나 종교가 ‘사후 세계’나 ‘지속되는 존재’를 언급하지만, 신학은 부활을 통해 ‘인격적 하느님과의 영원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어느 문화든 영원을 향한 갈망이 있으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친교를 핵심으로 삼는 점이 특별합니다.


문7. ‘하느님과의 합일’이 곧 자아의 소멸이 아니냐는 우려에 대한 답은?
답: 신학적 전통에 따르면, 하느님과 합일되어도 ‘개인의 고유성’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완전한 자유로운 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실현하게 됩니다. 자아가 흡수·소멸된다기보다, 더 풍부해지고 해방된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문8. 영원한 삶을 탐구하는 것이 삶의 ‘현실성’을 저해할 위험은 없나요?
답: 오히려 ‘현실성’과 ‘초월성’이 서로 보완관계임을 봅니다. 영원에 대한 숙고는 실존적 질문을 자극하고, 현재 삶에 더 큰 책임감과 의미를 부여합니다. 따라서 이 둘은 상충되지 않고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문9. 영원한 삶이 있다 해도, 인간에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요?
답: 만약 무의미한 영원이라면 그것이야말로 ‘고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은 하느님이라는 최상의 善·사랑과의 합일로 정의되므로, 충만한 기쁨을 함축합니다. 의미 없는 영속이 아니라, 선과 행복의 완성된 상태로서의 영원입니다.


문10. 영원을 믿지 않는 이에게, 영원한 삶의 가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답: 논리적 설명에 앞서, ‘인간이 무한을 갈망하는 근본 욕구’, ‘선과 사랑의 절대적 가치를 꿈꾸는 마음’ 등을 나누는 게 시작일 수 있습니다. 철학적으로도 윤리적 절대 가치와 무한성에 대한 열망을 통해, 영원성의 가능성을 조심스레 제기해 볼 수 있습니다.




문11. 인간은 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동시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함께 지닐까요?
답: 죽음은 ‘내 존재의 상실’로 인식되어 본능적 공포를 일으키지만, 동시에 인간 내면에는 ‘소멸되지 않고 싶다’는 자기 보존 욕구가 있습니다. 이 모순이 종교적·영적 욕구를 자극해, 영원을 갈망하게 만드는 것이겠지요.


문12. “영원한 삶”을 믿으면, 일상 문제나 갈등에서 도피하는 방편이 되진 않을까요?
답: 오히려 건강한 신앙과 영원의식은 스트레스 상황을 ‘더 성숙하게’ 대처하도록 돕습니다. 회피가 아니라,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궁극적인 희망이 있다’는 인식이 회복탄력성을 높여 주는 것이지요.


문13. 죽음 이후에 대한 믿음이 우울이나 불안을 완화하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될까요?
답: 여러 심리학 연구에서, 긍정적 종교·영적 신념이 불안·우울과 같은 정서적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죽음 뒤에도 삶이 지속된다는 믿음은 ‘상실·무가치’ 감정을 줄여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문14. “부활 신앙”이 주는 심리적 효과는 무엇인가요?
답: 부활 신앙은 ‘절망스러운 상황에도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어, 학습된 무기력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을 줍니다. 심리적 차원에서 희망과 긍정적 태도를 강화시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15.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했을 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위로가 될까요?
답: 상실감은 크지만, ‘다시 만날 희망’이나 ‘그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계속 살아 있다’는 확신이 슬픔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도록 돕습니다. 이는 애도 과정을 건강히 거치는 데도 중요한 심리적 지지 요인입니다.


문16.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 심리 상태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답: 반드시 부정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죽음에 대한 불안이 크게 작용할 수 있고 ‘삶의 의미 찾기’에서 허무감을 느낄 위험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윤리적·실존적 노력을 통해 충만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문17. 영원에 대한 갈망이 ‘현재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지는 않을까요?
답: 잘못된 종교적 태도라면 현재를 무시하고 미래만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가치’가 있음을 믿는 사람은 오히려 현재에 충실하면서도, 보다 ‘깊은 차원’에서 삶을 해석하게 되므로 일상을 더 감사하고 풍요롭게 누릴 수도 있습니다.


문18. 죽음 자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죽음 긍정’ 심리와는 어떻게 다를까요?
답: 죽음 긍정은 ‘죽음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라 여기고 받아들이는 태도이고, 영원한 생명 신앙은 ‘죽음 너머 새로운 단계’까지 포함합니다. 전자는 죽음에서 멈추고, 후자는 그 이후까지 희망을 확장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문19. 내면에서 ‘영원’을 느끼고 싶지만, 여전히 불안과 의심이 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 의심은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영적·신앙적 공부, 기도와 명상, 신뢰할 만한 상담자나 영적 지도자를 만나는 것 등이 도움 됩니다. 의심과 불안 자체를 죄악시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 더 깊은 진리를 탐색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문20. “현세에서 체험하는 영원한 삶”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심리학적 근거는 있을까요?
답: 심리학에서 ‘몰입(flow) 경험’이나 ‘초월적·신비 체험’을 논의할 때, 시간 감각이 사라지고 영원 같은 느낌을 받는 경우가 보고됩니다. 이는 영성적 차원과 맞닿아 있어, 현재 순간 안에서도 ‘영원’을 맛보는 체험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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