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벼락처럼 (1999.9)
얼음과 독사의 다과회
1999년 9월. 처서가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인간들의 욕망이 뿜어내는 열기 탓에 서울의 가을은 유난히 덥고 끈적했다.
서울 강남의 프라이빗 갤러리 [아르테].
오직 철저한 예약제로만 운영되는 VVIP 룸의 공기는, 억 단위를 호가하는 추상화들만큼이나 고요하고 무거웠다. 유라는 최고급 다기에 담긴 홍차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찻잔이 부딪히는 맑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방 안의 정적을 깼다.
그녀의 맞은편 소파에는 단정한 이탈리아제 슈트를 입은 청년이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최태국의 둘째 아들, 이현.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단숨에 건너뛰고, 고작 스물셋의 나이에 명문대 경제학과 대학원까지 꿰찬 기형적인 천재. 유라는 그 서늘하고 오만한 얼굴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해원의 흙먼지라고는 단 한 톨도 묻어 있지 않은 완벽한 괴물이었다.
“아버지가 보낸 사냥개는 아닌 것 같고.”
유라가 소파에 깊숙이 기대며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
“원수의 아들이 내 갤러리까지 무슨 일일까. 찻잔에 독이라도 탔을까 봐 겁이 나진 않니?”
"이깟 홍차에 낭비하기엔, 당신이 품은 독이 너무 비싸고 치명적이잖나?"
이현은 테이블 위로 피어오르는 홍차의 얇은 김을 건조한 눈으로 응시했다.
“김유라. 아니, 디렉터 킴. 차기 검찰총장 후보라는 가장 날카로운 사법의 칼을 치마폭에 숨기고, 고향으로 내려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 우아한 독사.”
유라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자신의 은밀한 행보를 이 이십 대의 어린 괴물이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사실이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말조심해, 이현. 네 아버지 최태국이 해원 바닥의 왕일진 몰라도 여긴 서울이야. 내 손짓 한 번이면 너 같은 애송이 하나쯤은 당장 구치소 바닥에 처박을 수 있어.”
“알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이현은 흔들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칼을 내게 휘두르는 건 멍청한 짓이야. 너와 나는 목적지가 같으니까.”
“목적지가 같아?”
“네 목적은 내 아버지, 최태국의 숨통을 끊는 것. 내 목적은 내 아버지, 최태국의 제국을 합법적으로 완전히 붕괴시켜 내 소유로 재편하는 것.”
이현은 안경을 한 번 치켜올리며, 기계처럼 정교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넌 지금 하 검사를 움직여 태국 종합개발을 압수수색하고 아버지를 쳐넣으려 하겠지. 하지만 그건 삼류 복수극이야. 우리 아버지는 네 생각보다 훨씬 영악해. 장부는 이미 여러 겹으로 쪼개져 차명 계좌로 흩어졌고, 꼬리를 자를 고기 방패들은 해원에 널려 있어. 하 검사가 칼을 휘둘러봐야 변두리 깃털만 자른 채 끝날걸. 아버지는 150억이라는 거대한 현금을 쥐고 법망을 유유히 빠져나갈 거다.”
유라는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현의 말이 뼈아프게 정확했기 때문이다. 최태국은 법의 사각지대를 파고드는 데 있어 짐승 같은 촉을 지닌 악마였다.
“그래서?” 유라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네 아비한테 짓밟힌 철공소 딸한테, 그 아비 모가지를 벨 비법이라도 알려주러 왔다는 뜻인가?”
“비법이 아니라, 정확한 좌표를 주러 온 거다.”
이현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얇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대리석 테이블 위로 밀었다.
“태국 종합개발의 진짜 자금 흐름도. 이영숙이 차명으로 빼돌린 스위스 페이퍼 컴퍼니 계좌와, 산 24번지 인허가를 위해 박 군수에게 흘러간 비자금의 정확한 경로. 하 검사의 칼날이 정확히 이 심장부를 찌르게 만들어.”
유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것은 최태국을 단숨에 사형대로 보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급소였다. 친아들이 제 아비에게 피눈물을 쏟은 핏줄에게 아비의 심장을 찌를 칼을 쥐여주고 있었다.
“너… 제정신이야? 이게 터지면 네 아버지는 끝장이야. 너 역시 그 더러운 돈으로 쌓아 올린 도련님 자리에서 길바닥으로 나앉게 될 텐데?”
“길바닥?”
이현이 픽, 짧은 실소를 터뜨렸다. 타다 남은 재조차 얼려버릴 듯한 오만한 웃음이었다.
“난 길바닥에 나앉지 않아. 내 아버지가 150억의 성벽 밑에 깔려 짐승처럼 헐떡일 때, 내가 가장 헐값에 그 무너진 태국 종합개발을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 집어삼킬 거니까.”
유라는 눈앞의 이현을 보며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형 기백의 분노가 불타는 짐승의 것이라면, 이현의 분노는 차가운 금속성 기계의 것이었다. 그는 아비를 죽이는 것을 넘어, 아비의 시체를 가장 효율적으로 포식할 완벽한 셈법을 끝내놓고 있었다.
“기억해, 디렉터 킴.”
이현이 천천히 일어났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짚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압수수색 타이밍은, 내가 정확히 지시하는 그날, 그 시간이어야 해. 네 복수와 내 인수가 완벽하게 교차하는 그 순간. 아, 그리고.”
문손잡이를 잡으려던 이현이 고개를 돌려 유라를 곁눈질했다.
“내 형, 기백이한테는 내가 다녀갔다는 말 하지 마. 머리통이 뜨거운 인간들은 정교한 판을 짜는 데 방해만 되니까.”
권력의 정수리를 밟는 계산기
다과회가 끝난 지 불과 세 시간 뒤.
이현은 여의도의 한 최고급 실내 골프 연습장 VIP룸에 서 있었다. 스크린에 뜬 비거리를 보며 흡족하게 웃는 중년 사내. 차기 검찰총장 후보 영순위인 서울지검 하 차장검사였다.
“최태국 회장 둘째 아들이라고 했나?”
하 검사가 오만하게 이현을 훑어보았다. “디렉터 킴의 소개라 시간은 내줬지만, 어린 학생이 감히 내게 독대를 청할 줄은 몰랐군. 아무리 검정고시로 학교를 건너뛰고 명문대마저 조기 졸업한 수재라지만, 애비 뒷배 믿고 호기 부리는 거라면 썩 유쾌하진 않은데.”
“아버지를 믿고 온 것이 아닙니다. 차장님께서 머지않아 제 아버지를 짓밟고 올라서실 검찰총장 취임식의 ‘축의금’을 미리 계산해 드리러 왔습니다.”
하 검사의 눈매가 매섭게 좁아졌다.
“축의금? 디렉터 킴이 이미 훌륭한 그림(뇌물)을 가져다줬는데, 네가 그보다 더 구미가 당기는 걸 줄 수 있다는 뜻이냐?”
“그 그림은 차장님의 안주머니를 불려줄 뿐, 차장님의 ‘자리’를 보장하진 않죠.”
이현은 소파에 거만하게 걸터앉았다.
“고작 시골 졸부 하나 잡아넣었다고 청와대에서 총장 자리를 내어줄까요? 차장님께 필요한 건 단순한 지방 비리 척결이 아니라, ‘IMF 정국을 틈타 수백억의 국부를 유출한 경제 사범 일망타진’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타이틀입니다. 아버지가 숨긴 진짜 자금 루트와 정치권 로비 장부. 그건 장부를 훔친 디렉터 킴도 풀 수 없는 암호입니다. 오직 자본의 구조를 해부하는 저만이 그 스위치(해독키)를 쥐고 있죠.”
이현의 입에서 튀어나온 완벽한 정치 공학에 하 검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원하는 게 뭐냐.”
“타이밍입니다. 제가 신호를 보내는 날, 아버지가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그 150억짜리 기공식 날. 세상에서 가장 요란하고 잔인하게 아버지를 압수수색해 주십시오. 아버지가 구치소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동안, 저는 가장 헐값에 회사를 인수합병 하겠습니다. 차장님은 시대의 영웅으로 총장이 되시고, 저는 제국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겁니다.”
하 검사는 눈앞의 청년을 보며 섬뜩한 직감에 사로잡혔다. 사법 권력마저 철저히 자본의 장기말로 써먹는 괴물. 이현의 두 번째 벼락이 그렇게 여의도 한복판에 떨어졌다.
짐승의 덫, 형을 겨누다
그날 밤, 이현의 차가운 구두 굽은 고향 해원의 진흙탕을 밟고 있었다.
150억의 환각에 취해 불야성을 이룬 읍내. 이현은 번들거리는 룸살롱 [밀레니엄]의 뒷골목을 빠져나오는 기백을 발견했다. 기백의 눈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셔츠 자락에서는 이영숙의 비릿한 분 향기가 역겹게 묻어나왔다.
“아버지의 첩을 품으니, 복수라도 한 것 같아 짜릿합니까, 형.”
어둠 속에서 날아든 목소리에 기백이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이현이 니가 여긴 와 있노.”
기백이 주먹을 꽉 쥐었지만 이현은 코웃음을 쳤다.
“형의 분노는 늘 그런 식이지. 천박하고, 소란스럽고. 겨우 아버지 침소나 더럽혀놓고 혼자 비장해하는 꼴이라니.”
“입 닥치라! 니 같은 책상물림 새끼가 알어? 저 괴물 새끼 내장을 파먹으려면 내 영혼부터 썩은 물에 담가야 한다는 걸!”
기백이 짐승처럼 이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기백을 직시했다.
“그래서, 그 여자랑 자고 나면 아버지가 무너지나? 아니. 아버지가 150억을 쥐고 있는 한, 이영숙도 결국 널 배신할 거야. 짐승의 내장을 파먹으려면 짐승이 발을 딛고 있는 지반을 폭파시켜야지.”
이현이 기백의 손을 차갑게 쳐냈다.
“형. 머지않아 산 24번지 기공식 날, 아버지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연회를 베풀 거야. 형의 그 뜨거운 주먹과 분노는, 그때를 위해 아껴 둬.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그 오만한 자존심을 짓밟고 박살 낼 수 있게.”
이현은 기백의 맹목적인 분노가 폭발할 '정확한 과녁'을 설정해주고 있었다. 기백이 아비와 뒤엉켜 아비규환을 만들어 줄 때, 이현 자신은 그 혼란을 틈타 회사의 숨통을 쥘 참이었다.
이성의 독(毒), 살인마를 잉태하다
해원장으로 들어선 이현의 마지막 발걸음은 가장 어둡고 퀴퀴한 뒤채를 향했다.
깊은 밤, 감나무 아래서 수만이 도끼로 장작을 패고 있었다. 쩍, 쩍. 나무가 갈라지는 파열음만이 고요한 밤을 찢었다.
“도끼질이 아주 정확하군.”
이현을 본 수만이 도끼를 내려놓고 납작 엎드렸다. “……둘째 도련님, 오셨능교.”
“일어나, 수만아. 우리 사이에 그런 굽신거림은 이제 역겹잖아.”
이현이 흙바닥의 장작 토막을 구둣발로 툭 걷어찼다.
“이 집안에서 아버지를 제외하고 진짜 머리가 돌아가는 인간은, 너와 나 둘뿐이라는 걸 난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넌 아버지가 가르친 탐욕의 셈법을 가장 완벽하게 흡수한 수제자니까.”
수만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단 한 번도 ‘인간’으로 인정받아 본 적 없는 서자의 지성을, 이 기형적인 천재 도련님이 완벽하게 긍정하고 있었다.
이현이 안채 쪽의 화려한 불빛을 응시하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수만아, 넌 병균(病菌)이 뭔지 아나? 몸속에 기생하며 숙주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암덩어리. 우리 아버지가 바로 그 암덩어리야. 해원을 병들게 하고, 우리 영혼을 갉아먹은 병균.”
수만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현의 목소리에는 살의나 분노조차 배제된, 차가운 수술실의 공기만 감돌았다.
“암덩어리를 제거하는 수술은 범죄일까? 아니. 그건 범죄가 아니라 ‘위생(衛生)’이지. 썩은 것을 도려내는 건 도덕 따위가 아니라, 구조를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절차일 뿐이야.”
수만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늘 ‘아비를 죽이고 싶다’는 천박한 원한에 시달려온 수만에게 이현은 지금, ‘합리성과 위생’이라는 완벽하고도 거룩한 면죄부를 쥐여주고 있었다. 아비를 죽이는 것은 패륜이 아니라 치유라는 독(毒).
“기백이 형은 감정에 휩쓸려 일을 그르칠 인간이야. 하지만 너라면 다르지. 넌 가장 완벽하게 아버지의 동선을 알고, 흔적을 지울 줄 아는 그림자니까.”
이현이 수만의 굳은살 박인 어깨를 두 번 툭, 툭 쳤다.
“수만아. 넌 더 이상 이 집안의 개가 아니야. 암덩어리가 사라진 세상에서, 넌 네가 가진 계산기 하나로 이 땅의 진짜 주인이 될 자격이 있어. 안 그런가?”
수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꽉 쥐고 있는 도끼 자루에서 핏기가 가시도록 하얗게 질린 손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현은 미련 없이 뒤돌아 해원장을 빠져나갔다.
그가 떠난 뒤란의 어둠 속. 이현이 주입해 놓고 간 차가운 이성의 독이 수만의 핏줄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온몸에 번져갔다.
‘그래… 이건 살인이 아니다. 청소다. 쓰레기를 치우고, 이 집의 진짜 주인이 되기 위한 완벽한 계산이다.’
수만의 시커먼 동공 속에서 마침내 가장 차갑고 잔혹한 살인마가 잉태되고 있었다.
1999년 9월, 이현이 내리친 세 번의 벼락은 그렇게 해원장을 완벽한 죽음의 화약고로 만들어놓은 채 고요히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