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온 신앙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의 무겁고 쓸쓸한 발걸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굳게 믿고 따랐지만,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그 기대와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만이 아니라, 이런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루카 24,21)
이 제자들의 탄식은 때때로 우리의 한숨과도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자녀 문제, 건강의 쇠약함, 경제적인 어려움 등 팍팍한 인생의 시련 앞에서, 우리가 머리로만 쥐고 있던 '단순한 믿음'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저명한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이 남긴 유명한 일화를 하나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노년의 그에게 한 기자가 인터뷰도중 "과거에 신을 믿었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믿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온화하지만 단호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요? 나는 굳이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그저 '압니다'(I don't need to believe. I know)."
참으로 깊은 울림을 주는 고백이지요. 억지로 믿으려 애쓰고 의심하는 단계를 지나, 오랜 세월 삶 속에서 하느님을 겪고 깨달아 내면 깊이 자리 잡은 확고한 '앎'의 경지를 말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좌절한 제자들에게 다가가신 방식도 이와 같았습니다. 주님은 다짜고짜 "왜 나를 다시 믿지 못하느냐!"며 다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들의 슬픔 한가운데로 조용히 다가가 곁을 걸어주셨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루카 24,15)
참된 신앙은 누군가 시켜서 억지로 교리를 외우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내 삶의 굽이굽이마다 묵묵히 나와 함께 걷고 계신 주님의 온기를 스스로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제자들 역시 흙먼지 날리는 길 위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영혼의 변화를 겪습니다. 낯선 길동무가 성경 말씀을 찬찬히 풀어주실 때, 절망으로 차갑게 식어버렸던 그들의 가슴에는 다시 따뜻한 불씨가 지펴졌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루카 24,32)
이것은 그저 머리로 새로운 지식을 배운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속에서 잊고 지냈던 하느님의 사랑이 내 가슴을 다시 어루만질 때 일어나는, 참으로 뜨겁고 거룩한 영적 체험이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여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가슴 벅찬 체험들이 내 삶 속에 하나둘 늘어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머뭇거리던 제자들의 얕은 '믿음'이 온전한 '앎'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것은 하늘이 갈라지는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식탁의 나눔, 바로 우리가 늘 미사에서 거행하는 '성찬례'를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루카 24,30-31)
주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순간,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비로소 활짝 열렸습니다. 이제 그들은 누군가에게 전해 듣고 부활을 '믿으려 애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내 눈으로 보고 내 가슴으로 모시어, 분명히 '아는' 사람들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각자의 사연을 안고 엠마오로 가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때로는 삶의 무게가 버거워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지나온 세월을 가만히 돌아보면, 하느님께서는 그 힘들었던 순간순간마다 늘 우리 곁에서 말없이 함께 걸어주고 계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무렵 두 제자는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루카 24,35)
제자들의 이 기쁜 증언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모진 풍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우리의 신앙도 내 삶과 미사 안에서 다져진 단단한 '앎'으로 무르익어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칼 융의 저 망설임 없는 고백처럼, 우리도 환하게 웃으며 "나는 주님이 살아계심을 굳이 믿으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내 가슴으로 온전히 겪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풍성한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