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내면의 깊은 심연에서 깨어나는 진정한 삶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5-26)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의 어둠을 이기시고 마침내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굳게 닫힌 무덤의 돌을 굴려내신 주님의 따스한 부활의 빛이 우리 교우님들의 가정과 삶, 그리고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충만한 평화로 스며들기를 빕니다.
우리는 해마다 부활절을 맞이하며 빈 무덤의 기적을 기뻐합니다. 하지만 화려한 전례가 끝나고 다시 팍팍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가만히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50 평생, 60 평생을 살아오시면서 가슴 한구석에 켜켜이 쌓인 지난날의 상처,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짓눌려 있지는 않으신지요.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미움과 두려움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감옥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쇠창살 안에서 참된 자유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부활은 2천 년 전 옛날이야기나 죽고 나서야 겪을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단절되고 갇혀 있던 내 마음 가장 깊은 바닥에 주님께서 찾아오시어 매일매일 새롭게 문을 열어주시는 살아있는 기적이어야 합니다.
요동치는 우물 표면, 혼(프쉬케, Psyche, ψυχή)이 지배하는 삶
"내 영혼아, 어찌하여 허덕이며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시편 42,6)
우리가 이토록 살면서 마음이 헛헛하고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가톨릭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 즉 '전체적인 영혼'의 움직임을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살펴봅니다.
그 첫째는, 희랍어로 '프쉬케(Psyche, ψυχή)'라 부르는 '혼'의 차원입니다. 이는 머리로 생각하는 지성, 무언가를 결심하는 의지, 그리고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감정의 영역을 뜻합니다. 이 '프쉬케'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이 아름다운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허락하신 참으로 귀하고 필수적인 영혼의 기능입니다.
하지만 원죄의 흔적과 긴 세월 살아오며 가슴에 쌓인 상처들 때문에, 이 '프쉬케'가 하느님의 은총을 잃어버린 채 내 삶의 주인이 되어버리면 문제가 생깁니다. 내 얄팍한 생각과 두려움, 억눌린 감정들이 삶의 운전대를 쥐게 되면, 우리는 아주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받고 크게 휩쓸리게 됩니다. 가끔 미사 중에 뜨거운 감정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것도 좋은 은총이지만, 감정(프쉬케)에만 기대어 신앙생활을 하면 기분이 좋을 때는 천국 같다가도 우울할 때는 지옥을 오가는 '영적 롤러코스터'를 타기 쉽습니다.
이러한 겉마음은 마치 우물의 표면과도 같습니다. 살면서 부는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흙탕물이 일고 파도가 칩니다. 이 찰랑거리는 겉마음의 소란스러움을 내 존재의 전부라고 여긴다면, 십자가 고난 너머에 예비된 부활의 굳건한 평화는 누리기 어렵습니다.
내면 가장 깊은 맑은 샘, 생명의 숨결(루아흐, Ruach, רוּחַ)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세 2,7)
그렇다면 요동치는 이 마음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까요? 바로 여기서 우리 내면을 이루는 두 번째 차원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가장 깊고 거룩한 중심부, 하느님의 빛이 머무는 지성소인 '영'의 차원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흙으로 빚은 사람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명의 숨결, 즉 히브리어로 '루아흐(Ruach, רוּחַ)'가 바로 이것입니다.
가톨릭 신학에서 이 '영(루아흐)'은 혼과 동떨어진 남남이 아니라, 영혼이 하느님을 향해 열려 있는 가장 맑고 깊은 자리를 뜻합니다. 이 깊고 맑은 영의 자리가 내 생각과 감정을 다독이며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 우리 안에 세워두신 참된 질서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죄와 상처로 엉망이 된 우리 마음속의 무질서를 이 아름다운 태초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으시는 위대한 치유의 사건입니다.
겉마음이 아무리 요동치고 삶의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쳐도, 우물 맨 밑바닥에 흐르는 샘물은 언제나 맑고 고요한 법입니다. 우리가 겪는 그 어떤 병고나 인생의 뼈아픈 실패 속에서도 이 깊디깊은 영의 자리는 결코 훼손되거나 더럽혀질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흔들리지 않는 영의 맑은 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다시 온전히 세워 주십니다.
심연(테홈)에서 온전한 마음(카르디아)으로 깨어나는 부활
"당신 폭포 소리에 심연이 심연을 부릅니다. 당신의 파도와 물결이 몽땅 제 위를 덮쳐옵니다." (시편 42,8)
우물 표면의 소음을 지나 이 맑은 샘에 다다를 때, 진정한 부활의 기적이 내 안에서 일어납니다. 성경은 끝을 알 수 없이 깊고 넓은 바다와 같은 마음의 밑바닥을 히브리어로 '테홈(Tehom, תְּהוֹם)', 즉 심연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에서 이 심연(테홈)은 본래 질서가 잡히기 전의 거친 혼돈과 어둠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상처와 두려움으로 일렁이는 우리 내면의 혼돈 위로 다가오시어, 생명의 숨결(루아흐)을 불어넣으심으로써 그곳을 잔잔하고 거룩한 은총의 샘으로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이렇게 깊은 심연에서 생명의 숨결로 깨어난 내면은, 마침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마음(카르디아, Kardia / 레브, Leb)'이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은 단순한 감정의 덩어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온 존재가 하느님을 인식하고, 흔들림 없는 의지로 그분을 선택하는 거룩한 결단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이 순일한 참된 마음을 회복할 때, 비로소 나를 옭아매던 미움과 두려움의 쇠창살이 부서집니다. 굳이 머리로 이리저리 따지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을 척 알아채게 되고, 미워하고도 남을 사람을 보아도 내 감정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넉넉한 마음으로 한 번 품어보려 결단하게 됩니다. 그저 십자가 앞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억눌림 없는 참된 자유와 찬미가 우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을 일상으로 살아내는 비움(케노시스, Kenosis, κένωσις)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필리 2,5.7)
형제 자매 여러분, 이 부활의 참된 자유를 일상 속에서 누리기 위해서는 비움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희랍어로 '케노시스(Kenosis, κένωσις)', 즉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온전히 비워내는 연습입니다. 자꾸 무언가를 더 움켜쥐려 하고 내 생각만을 고집하면 오히려 영혼의 깊은 샘은 탁해지기 마련입니다.
걱정 많고 다급한 겉마음의 소리를 가라앉히고, 마음을 고요히 한 채 주님의 곁에서 가만히 귀 기울이는 침묵의 기도를 바쳐 보십시오. 성경 말씀도 눈으로만 읽지 마시고, 깊은 영의 심연까지 푹 젖어들도록 가슴에 품어 보십시오.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영의 음성은 세상의 소음처럼 시끄럽지 않고,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묵직하고 따뜻한 평화를 안겨줍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요한 20,16)
주님의 빈 무덤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던 마리아 막달레나를 떠올려 보십시오. 깊은 슬픔과 두려움에 빠져 그녀의 겉마음(프쉬케)이 거칠게 요동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가가 "마리아야" 하고 그녀의 가장 깊은 영의 심연을 부르셨습니다. 그 짧은 부르심에 마리아의 내면이 환히 깨어나며 온전한 마음(카르디아)을 회복했고, 단절의 감옥에서 벗어나 말할 수 없는 부활의 환희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부활 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세월 어깨에 지고 온 삶의 무거운 짐, 여전히 마음을 어지럽히는 세상의 파도에서 잠시 눈을 돌려 보십시오. 그리고 내 존재의 가장 깊고 맑은 샘, 그 깊은 심연을 가만히 바라보십시오. 그곳에 이미 부활하신 주님께서 환한 미소로 다가와 위로의 손길을 내밀고 계십니다.
지난날의 두려움과 오랜 상처, 마음의 쇠창살일랑 빈 무덤에 훌훌 털어버리시고, 세상이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든든하고 찬란한 부활의 자유를 이웃과 넉넉히 나누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다 함께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