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과 동시에 친정으로 들어오면서 피아노 강사일을 그만뒀다.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할 여유는 없었다. 음대를 나와 음악 강사로 여기저기서 일을 하며 원금 이상은 회수했으니 이 정도면 손해는 아닌셈치기로 했다.
백수가 된 뒤 가장 자주 가는 곳은 도서관이다. 날이 화창할 땐 자전거를 이용하고, 비가 오는 날엔 걸어간다. 산뜻한 어깨 컨디션을 위해 가방은 가볍게 꾸린다. 무인양품에서 산 반투명 필통에 검은 펜, 빨간펜, 샤프 하나씩 넣고, 크래프트지로 겉이 단단한 A5 사이즈의 줄노트 한 권도 챙긴다. 팟캐스트로 뉴스를 재생한 뒤 에어팟을 귀에 꽂고 집을 나선다. 양재천까지 5분. 양재천을 따라 15분. 부지런히 걷다 보면 금세 도착이다.
도서관엔 나이 불문 다양한 얼굴들이 있다. 내 수많은 사연일랑 이곳에선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나는 정진하는 무리들 틈에 슬며시 끼어들어 ‘하는 사람’이 된다. 좀처럼 무뎌지지 않던 혼자라는 감각이 까무룩 잊힌다. 문장들을 읽어내고, 쓰고, 편집하는 시간. 막혔던 숨이 트이니 잠시 살 것 같다.
오전 공부가 끝나면 허기가 몰려온다. 배부르게 먹으면 식곤증에 시달릴 수 있으니 간단한 것이 좋다. 도서관 3층에서 판매 중인 샌드위치가 딱 알맞다. 샌드위치의 겉면은 버터로 구운 짙은 밤색이 아닌 핏기 없이 마른 베이지색이다. 첫인상은 다소 퍽퍽해 보이지만 빵 사이사이에 크림이 발라져 있어서 생각보다 부드럽게 넘어간다. 내 위장에 비해 적은 양이기 때문에, 최대한 오래 씹어야 아쉽지 않다. 만찬은 저녁으로 미루고 다시 2층으로 내려가 나머지 공부를 시작한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글자가 안 읽히면 보통 오후 다섯 시다. 저녁메뉴를 생각하며 도서관을 나선다. 초록은 선명하고 바람은 시원하다. 여전히 느낀다. 감동한다. 웃는다. 그리고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온 뒤 엄마 아빠는 바빠졌다. 같이 산책도 나가고 술도 마셔준다. 밤새 화장실을 보수하겠다며 퍼티를 바르고 선반을 붙여도 그러려니 해주신다. 지금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
잠들기 전 거실에 놓을 소파를 주문한다. 소파 밑으론 강아지가 들어가 쉴 수 있게 수납장 대신 강아지 집으로 요청한다. 렌지대를 정리하고 배송 온 아크릴 전신거울도 설치한다. 날 위해 비워진 방 한 칸도 채워야 한다. 남편과 살던 집에서 거의 아무것도 가져오질 않았으므로 살 게 많다. 침대도 옷장도 엊그제 도착해 정리할 게 태산이다. 고맙다. 정신없이 할 일들이 많은 게.
아이를 돌보던 삶에서 벗어나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일단 공부가 끝난 나머지 삶엔, 집을 돌본다. 혹은 강아지를 돌본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손가락을 물어뜯는다. 왼쪽 엄지손가락은 거의 지문이 없어질 판.
그 정도는 너무 괜찮다. 불안하지 않은 인생은 없을 테니까. 다리를 떨거나 손가락을 베어무는 나 자신을 나무라지 않는다. 대신 내일도 또 그 내일도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고 주문 같은 혼잣말을 한다. 그러고 있노라면 자정이 온다. 하루가 간다. 푹 자고 나면 새로운 아침이 시작된다. 그리고 나는 새로 시작하는 건 뭐든지 자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