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이라 다행이야 | 1편
스타트업 입사 첫 주, 해야 할 일 두 가지가 생겼습니다.
웹사이트 제작. 이메일 마케팅.
둘 다 해본 적 없었어요.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요.
알고 있었습니다. 주니어지만, 이 일을 이 회사에서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렇기에, 가장 잘 알고 있어야(혹은 잘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요.
사수가 없다는 것의 설움은, 스타트업에서 합류하며 몸으로 알게 됩니다.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무너진 하늘에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지요. 사수가 없었기 때문에 세상을 사수로 삼을 수 있었고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스타트업에서 사수가 없다는 건, 혼자 방치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당연히 같이 하는 사람이 있죠. 세일즈 담당자와 함께 웹사이트를 기획했고, 이메일 마케팅도 함께 준비했어요. C-level(대표와 이사진)과 더욱 가까이 일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입니다. 회사와 서비스의 중심을 더 가까이서 확실히 볼 수 있거든요.
그런데, 실무에 있어서는 좀 다릅니다.
사수가 없다는 것은, 정답, 정답이 아니더라도 정답에 근접한 것조차 확실히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다들 이런 상황이 처음이거든요.
그게 진짜 문제였습니다.
사수가 없다는 게 아니라, 기준이 없다는 게. 뭐가 맞는 방법인지 모르겠다는 게.
그래서 대부분의 기준은 회사 밖에서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그게, 제게 맡겨진 일 중 하나였던 거예요.
제게 첫 기준이 된 것은 책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어린 시절 독서를 좀 했거든요. 물론 대학 시절 내내 재밌는 게 책 바깥에 너무 많아 전공 서적 외에는 거의 손에 쥔 적이 없긴 합니다.
그러나,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쥔다고, 급박하니 책에서 지혜를 찾게 되더라고요.
특히, 입사 직전에 읽은 라이언 홀리데이의 [그로스 해킹]은 제게 마케팅의 이상과 꿈을 가득 안겨줬습니다. 에어비앤비가 크레이그스리스트를 해킹해서 초기 유입을 폭발시킨 이야기, 드롭박스가 광고 대신 제품에 바이럴을 심은 이야기. 마케팅이 단순히 광고로 돈을 태우는 일이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위한 효율적인 방법을 찾기 위한 지속적인 실험을 해나가는 일이라는 것.
그게 제 첫 번째 기준이 됐어요.
물론 그 기준이 모든 것의 정답은 아니었을뿐더러, 제게 직접 실무적인 가르침을 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의 프레임이 있다는 것, 공감대가 회사와 함께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 달랐어요. 뭘 시도해야 할지 모를 때, 적어도 "이게 그로스 해킹적인 접근인가?"를 물어볼 수 있었으니까요.
책을 사수 삼기.
이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이후에 시작한 탐독은,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지속되었습니다. 노션에 놓치지 않고 기록한 책이 그동안 백권 정도가 되는 것 같습니다. 모든 문장과 단어가 제게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빅데이터로 학습한 AI처럼, 제게 은은하게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기준은 사람이었습니다.
입사하던 때 MoTV(모배러웍스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가 유튜브에서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현재는 작지만 단단한 모습으로 성수동에 작은 영화관 '무비랜드'를 열어 운영 중이지만, 당시에는 완전 초창기라고 부를 만했던 시기였죠. 물론, 그들은 이미 본업에서 내공을 잔뜩 쌓아 둔 사람들이었기에 제 사수가 되어주기에 충분하고도 넘쳤습니다.
협업이 생기고, 팬층이 생기고, 브랜드가 커지는 걸 저는 유튜브를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2020년에는 배달의민족에서 브랜드 마케팅을 맡았던 이승희, 김규림 마케터의 두낫띵클럽이 MoTV와 협력을 시작하기도 했던, 아주 흥미로운 해였답니다.
솔직히 많이 부러웠습니다. 멋있었고요.
근데 그 부러움이 기준이 됐어요. "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지? 저 기획은 왜 저렇게 됐지?" 보면서 자연히 묻게 되더라고요.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보면서 스스로 질문을 만들 수 있었어요.
랜선 사수는 나를 가르쳐줄 뿐 아니라 돌아보게 했습니다. 스스로 질문을 만들게 해주는 사람들이었어요.
세 번째 기준은 공간이었습니다.
회사는 마침 뚝섬역 인근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성수동이 막 날개를 치며 떠오르던 시기였고, 팝업과 브랜드 공간들이 하나둘 생겨나던 때였죠.
특히 두 공간이 기억에 남아요.
입사 다음날, 블루보틀 성수 1호점이 오픈했습니다.
LA와 교토에서 이미 가본 적 있었던 브랜드였어요. 그래서 오히려 더 궁금했습니다. 왜 한국이었는지, 왜 성수였는지, 왜 저 벽돌 건물이었는지. 공간 하나를 보면서 브랜드의 의사결정을 찾아보곤 했어요.
Peaches 피치스도 그랬습니다.
자동차, 음악, F&B, 패션을 한 공간에 묶어 문화를 만들어가는 방식. 브랜드가 제품을 파는 게 아니라 세계관을 만든다는 걸 몸으로 느낀 첫 경험이었어요.
정답을 아는 사람이 없을 때, 잘 만들어진 것들을 보면서 스스로 질문을 만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했지? 대체 어떻게 한거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 질문들이 쌓여 기준이 되어갔죠.
지금 사수가 없어서 막막한 시기를 보내시거나, 스타트업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을 고민하는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결국 기준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누군가 가르쳐줘서 좋은 기준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옆에 붙어서 나에게 하나하나 매니징 해줄 사람이 있다면 그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국 소화시키는 것은 나의 몫이더라고요.
그렇지 않다고 한들 요즘은 우리를 도와줄 수많은 정보의 소스들이 있습니다.
책에서,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잘 만들어진 공간에서 배워봅시다. 그리고 그렇게 가져온 기준들이 쌓여서 결국 나만의 기준이 됩니다.
스타트업이라서 사수가 없었던 게, 돌아보면 다행이었어요. 덕분에 세상 전체를 사수로 삼을 수 있었으니까요.
혹시 지금 비슷한 상황에 있나요?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어떤 방법이 도움이 됐는지 — 이야기 들려주세요.
저도 정말, 하루하루가 배움의 연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