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깊게, 그리고 비효율적으로

생존의 밀도

by 마케터 X
생존의 밀도.png

평균의 종말

지난 글에서 나는 AI를 쓰며 업무 속도가 0.1배로 느려졌다고 털어놨다. 남들이 3초 만에 이미지를 뽑아낼 때, 나는 3일 밤낮으로 코드를 짜며 삽질을 했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미련하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이야기는 다르게 읽힌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AI 시대의 본질은 평균의 붕괴다. 과거에는 그럴듯한 기획안을 쓰고, 매끈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 자체가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프롬프트 한 줄이면 누구나 상위 20% 수준의 결과물을 금새 만들어낸다.

이는 빠르고 효율적으로 만든 결과물의 가치가 0에 수렴한다는 뜻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희소성이 없으니까.


비효율이라는 진입장벽

모두가 10X의 속도로 달릴 때, 차별화는 어디서 올까? 아이러니하게도 AI 혼자서는 절대 못 하는 비효율적인 구간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플레이어블 광고'를 다시 생각해 보자. 솔직히 말해 성과가 대박 나지는 않았다. 투입한 시간에 비하면 효율은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단순히 예쁜 배너였다면 고객은 0.1초 만에 스크롤을 내렸을 것이다. 엉성하더라도 낯선 상호작용이 있는 그 광고 앞에서 고객은 잠시나마 멈췄다.


'비효율'이 없었다면, 고객의 '멈춤'도 없었을 것이다.


남들이 3초 만에 만드는 콘텐츠는 경쟁자가 100만 명이라고 하자. AI의 시대 이후 1일, 아니 단 3일이라도 고민해서 만든 콘텐츠는 경쟁자가 거의 없다. 이제는 누구나 쉽고 빠르게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어쩌면 이제 비효율은 나를 보호하는 가장 현실적인 진입장벽일지도 모른다.


오퍼레이터에서 아키텍트로

AI 시대의 직장인은 두 부류로 나뉠 것이다. 오퍼레이터(Operator)아키텍트(Architect).

물론 둘 다 고퀄리티를 추구한다. 하지만 방향이 다르다.

오퍼레이터의 경쟁력은 '도구의 숙련도'다. "어떻게 프롬프트를 짜야 더 멋진 이미지가 나올까?"를 고민한다. 이들은 AI를 누구보다 잘 다루지만, 아이러니하게도 AI가 똑똑해질수록 입지가 좁아진다. AI가 발전할수록 복잡한 프롬프트 없이도 누구나 고퀄리티 결과물을 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기술의 평준화가 그들의 희소성을 지워버린다.

반면 아키텍트의 경쟁력은 '설계와 구현'이다. 이들은 AI에게 단순히 "그려줘"라고 하지 않는다. "이 이미지와 저 코드를 어떻게 연결해야 '작동'하니?"를 묻는다. 오퍼레이터가 AI로 '예쁜 벽돌'을 찍어내는 데 만족한다면, 아키텍트는 AI를 시켜 그 벽돌로 '집'을 짓는다. 단순한 이미지 한 장은 누구나 3초 만에 뽑지만, 그 이미지에 AI가 짜준 코드를 입혀 상호작용하는 결과물로 조립해 내는 것은 설계자의 몫이다.


속도보다 밀도

AI로 말미암아, 사회는 더 빨리 결과물을 내놓으라고 재촉한다. 하지만 AI 사용자인 우리는 그 속도전에 말려들어선 안 된다. 속도는 기계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쌓아야 할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밀도'다. 얼마나 더 치열하게 고민했는가. 얼마나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는가. 그 '밀도'가 담긴 결과물만이 AI가 쏟아내는 노이즈 속에서 빛날 수 있다.

당신이 지금 AI를 붙잡고 씨름하느라, 삽질하느라 야근을 하고 있다면. 그건 도태되는 것이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를 쌓고 있는 과정일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AI가 만드는 비효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