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18년 첫 여름휴가 여행지는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우연히 마주한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선정한 최고의 오로라 관측지', '3박 시 오로라를 볼 확률 95%' 단 두 마디의 캐나다 관광청 홍보문구는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인생은 오로라를 본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눌 수 있지 않겠어?"라며 떠들고 다니던 나는 결국 캐나다행 항공권을 선결제하고야 말았다.
출처: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오로라 여행의 목적지인 옐로나이프(Yellowknife)는 알래스카와 그린란드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세계지도에서 보면 북아메리카 대륙 위쪽에 다도해 같이 그려진 섬들과 함께 하얗게 칠해져 있고, 어린이 지도라면 옆에 에스키모 소년과 북극곰 한 마리쯤 그려져 있는 그런 위치랄까. 인구수가 2만 명도 채 안 되는 이 한적한 도시에 전 세계 수많은 여행자들이 모이는 유일한 목적은 단 하나, '오로라'였다.
무려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3박 여행에 95%의 확률로 볼 수 있다고 하니, 기필코 보고 오리라는 결심으로 옐로나이프에 4박 5일 머무르는 일정을 세웠다. 커다란 알래스카 말라뮤트가 함께 산다고 해서 고른 에어비앤비부터, 어두운 밤 차량을 타고 오로라를 찾으러 떠나는 오로라 헌팅 업체까지 모두 예약을 마쳤다. 이제 하루하루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탁상 달력을 보며 휴가일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오로라 관찰의 관점에서 이번 여행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이 글은 예쁜 오로라 사진과 꿀팁으로 가득한 관광 후기가 아님을 먼저 전한다. 이 것은 큰 맘먹고 오로라 보러 가서 맘고생 크게 한 웃픈 이야기이며, 춥고 어두운 밤 오로라를 기다리며 떠올린 세 가지 생각들이다.
첫째, '무엇이든 성수기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 여행자들이 부푼 마음으로 오로라를 찾아오는 작은 도시, 옐로나이프 (Yellowknife)
옐로나이프의 성수기는 철저히 오로라 관측의 가능성을 따른다. 그중 한국 추운 겨울 날씨 수준으로 오로라를 관측할 수 있는 여름 성수기 시즌은 8~9월인데, 연휴 활용을 위해 10월 초를 목표로 하던 나는 <준성수기: 9월 말~ 10월 초>라는 캐나다 관광청 정보에 꽂혀 자기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 비행기 값도 훨씬 싼데 성수기에 3박 투자하는 대신 준성수기에 4박 투자하면 오로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 행복 회로가 제멋대로 웅웅 돌아갔다.
안타깝게도 허튼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보다 비싼 비용을 들여 떠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커플 여행자로 가득 찬 오로라 헌팅 버스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기다렸건만, 첫날밤과 이튿날 밤 모두 구름 낀 날씨 탓에 오로라는커녕 밤하늘 별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오로라 헌팅 가이드님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니버스로 이곳저곳을 돌아봐주시며, '지난주손님들은 오로라 질리게 보고 가셨는데...'라며 안타까워하실 뿐이었다.
새삼 성수기라는 것이 참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성수기를 피해 가는 여행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믿어왔었다. 유럽은 대학생이 많은 여름/겨울방학을 피하는 것이 좋고, 홋카이도는 겨울보다 몇 배 싼 여름에 여행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무엇이든 비싼 성수기 요금이 싫었고, 거리에 가득 찬 그저 그런 여행객 중 하나가 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성수기라는 것은 축적된 데이터 분석의 산물이다. 여행 산업의 공급자와 수요자들은 한정된 시공간에 최고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오랜 시간 경험하며 값을 매겨온 것이다. 더군다나 오로라 같이 자연이 허락해주어야만 할 수 있는 경험이라면 더욱 비쌀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수기와 준성수기 사이의 단 일주일 차이에도 몇십만 원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둘째, '작은 비용에 가려 큰 기회를 잃지 말자.'
옐로나이프 최고의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로컬 맥주 공장(NWT Brewing Company)
그렇게 이틀 밤을 허탕을 치고 나니 초조함이 밀려왔다. 셋째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밖으로 뛰어 나가 하늘을 올려보았지만 여전히 구름만 가득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날씨 어플을 아무리 새로고침 해보아도, 오늘의 날씨 예보 '흐림'은 변함이 없었다.
상심이 너무 컸던 탓일까, 나는 돈이라도 아껴야겠다는 마음에 당일 오로라 투어를 신청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라를 볼 팔자가 아닌가 보다. 에잇, 이 돈으로 어제 봤던 로컬 맥주 공장에서 맥주나 실컷 먹자. 답답한 마음에 대낮부터 홀로 찾아간 펍에서 동네 주민들 구경도 하고 핸드폰으로 글도 끄적이며 맥주만 다섯 잔은 마셨던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대낮부터 마신 맥주 탓인지 추운 날씨를 탓인지 모를 불그스레한 얼굴로 해 질 녘 다시 길을 나섰다.
그런데 터덜터덜 숙소를 향해 걸어가는 중 갑자기 날이 조금씩 좋아지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미 당일 투어를 신청하기엔 이미 늦어버렸기에, 오로라 끄트머리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에 어둑한 마을 언덕배기에도 올라가 봤지만 헛수고였다. 참, 허탈함과 억울함에 아이처럼 눈물이 찔끔 나오려 했다.
같은 비행기로 옐로나이프에 도착하며 우연히 만났던 다른 한국인 여행자가 있었다. 내가 오로라 헌팅을 포기했던 그 날, 나보다 여행 일정이 하루 짧았던 그분은 나와는 달리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마지막 오로라 헌팅을 강행했다. 한 순간의 엇갈린 선택으로나는 다음 날 그분이 싱글벙글 웃으며 보여주시는 오로라 사진을 보면서 하염없이 부러워할 뿐이었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 소중한 휴가와 큰 비용을 들여 옐로나이프에 왔다. 그런데 단 9만 원의 투어비를 아끼겠다고, 나는 일생에 단 네 번 뿐일 수도 있는 기회 중 하룻밤을 포기한 것이었다. 작은 추가 비용에 인색했던 나는 큰 기회를 잃고 말았다. 아무리 확률이 낮아 보이더라도 그 날 오로라 헌팅 투어를 가는 것이 돌이켜보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날 아침에는 뭔가 씐 것처럼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셋째, '도시에서는 별과 오로라를 볼 수 없다.'
우상단의 하얗게 빛나는 옐로나이프 도심 상공
드디어 마지막 밤, 나는 초라한 마음으로 오로라 헌팅 버스를 탔다. 오로라 헌팅 가이드님에게 드물게 불쌍한 여행자가 되어 조수석에 앉는 특권을 누렸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날씨는 오늘도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이렇게 내가 4박 5일에도 옐로나이프에서 오로라를 못 보는, 바로 그 운 없는 5%가 되는 것이구나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참, 문자 그대로 값 비싼 교훈을 얻는 여행이구나.
오로라 헌팅 투어는 도심을 벗어나 어두운 외곽으로 떠난다. 자동차 라이트 없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길을 한참을 달리다 보면, 저 멀리 유독 뿌옇게 빛나는 하늘을 볼 수 있다. 마치 검은 바닷속 하얀 섬처럼 빛나는 한켠의 하늘은 바로 옐로나이프 도심의 상공이었다. 서울처럼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큰 도시도 아닌데도, 저 작은 도시에서 나오는 빛만으로도 하늘이 뿌옇게 가려지는 것이었다. 가이드님은 이런 빛공해 때문에 도시에서는 오로라와 별을 보기 어려운 것이라 설명해주셨다.
사실 많은 고민을 안고 떠난 휴가였다. 지난 일 년 동안 정말 정신없이 일하며 미뤄왔던 고민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좋은 직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일해왔지만 스스로에게 아쉬웠던 순간들이 있었다. 아직 젊은 나이에 배워야 할 것이 많은데, 뱃살을 얻고 총기를 잃어가는 나 자신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직장 명함으로 포장되지 않은 나 자신이 아직 부족함을 느끼며, 이렇게 작은 한 줌의 능력으로 20년 여를 더 버텨낸 후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지 고민이었다.
그러나 눈 앞에 쌓여가는 업무와 매달 갚아야 할 카드값, 그리고 아늑한 일상 속에서 이런 고민들은 쉽게 잊혀진다. 마치 우리가 도시의 빛공해에 익숙해져 별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 조차 잊고 살아가는 것처럼.별과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 도시를 떠나는 것처럼, 우리도 가끔은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자신을 돌이켜봐야 하지 않을까. 언제 올 지 모를 자연의 오로라를 기다리며, 내 인생의 오로라는 무엇일지 생각에 잠겼다.
결국 나는 오로라를 본 사람이 되었다.
4일간의 맘고생 끝에 건진 유일한 오로라 사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애태웠던마지막 밤, 두터운 구름이 잠시 옅어지자 희미하게 초록빛으로 빛나는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려워 사진기로 장시간 노출 촬영을 해야만 구름 뒤편 빛나는 오로라를 볼 수 있었지만,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오로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렇게 염원하던 오로라를 본 사람이 되었고, 단 한 장의 오로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만약 제대로 된 성수기에 옐로나이프를 여행했다면 나는 감흥이 떨어질 만큼 오로라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여행의 셋째 날 일기예보를 보고 속단하여 오로라 투어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보다 나은 오로라를 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번 여행은 오로라 관찰의 관점에서 분명히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인생의 성수기에 작은 비용에 가려 큰 기회를 놓치지 않을 선택을 고민하게 해 준 고마운 여행이 됐다. 즐거운 젊음과 안정된 직장에 눈멀지 않고, 내 삶의 오로라를 찾아 떠날 용기에 한 걸음 더 내딛게 해 주었다. 비록 오로라가 흐리멍덩해서 원하는 바에 한참 못 미칠 수도 있고, 오로라를 봐야만 인생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생은 오로라를 본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눌 수 있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