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노트북 충전기를 조심스레 꽂으면서 문득 유학생활과 닮아 있다 생각이 들었다. 해외여행 가서 어뎁터를 사용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보았겠지만, 어뎁터라는 게 생각보다 불편한 게 많다. 내 어댑터가 저렴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1) 어뎁터를 언제나 추가로 챙겨야 하고 (도서관 다 와서 기숙사에 두고 온 걸 알았을 때의 절망감이란!), 2) 어뎁터 모양/크기 때문에 못 꽂는 콘센트도 많고, 3) 가능한 콘센트를 찾더라도 그 전원이 통하는 순간을 찾기 위한 정밀한 컨트롤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살짝 밀었다가 뺐다가 하며 어렵게 맞춰놓은 어댑터를 지나가는 사람이 툭 건들고 지나가 전원이 꺼졌을 때엔 한숨이 절로 나온다.
220V의 한국인이 240V의 영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어댑터가 필요하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놓쳐버리는 영어 커뮤니케이션부터 외국인으로서 닿지 않는 기회까지, 해외 생활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은 불편하다. 하루는 영국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얼마나 안쓰럽게 쳐다보던지. 그러나 나는 ‘불편함이란 상당 부분 시간이 해결해주고, 스스로 콤팩트 하고, 범용성 좋으며, 연결이 튼튼한 어댑터가 되는 과정이니 걱정하지 마렴’ 하고 대답해주었다.
2019년 7월에 떠난 영국 석사 유학이 어느덧 6개월 차, 좌충우돌 적응하며 한 학기를 마치고 보니 벌써 12월 반짝반짝한 크리스마스 연말이 되었다. 벌써 유학간지 2년은 된 거 같다며 놀리는 한국 친구도 있고, 벌써 6개월이나 지나버린 걸 아쉬워하는 유학생 친구도 있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딱 내 걸음걸이에 맞춰 지나는 기분이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배우고, 즐기고, 인내하고, 이겨내는 하루하루. 다행히도 좋은 기숙사 룸메이트, 학교 친구, 교수님들을 만나서 그 과정들이 더 감사하고 즐거울 따름이었다.
매일 학교 가는 길, 파크 스트리트 (Park Street)
그럼에도 첫 학기를 보내며 몇몇의 위기의 순간들도 있었다. 특히 11월 즈음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우연히 다른 학생 인터뷰 연구에 참가하다 나 자신이 우울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처럼 경력을 중단하고 떠나 온 유학생들은 '이렇게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지', '진짜 열심히 하고, 그 누구보다 잘해야지'라며 다짐하며 더 열심히 지내려 노력하는 편이다. 회사 다닐 때와 비교하면 너무도 자유롭고, 늘 꿈꾸던 삶인데 감히 어떻게 불평불만을 할 수 있을까.
이런 다짐들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자발적 파이팅이라 생각했지만, 동시에 주변 사람들의 배려와 응원으로 떠나온 유학에 대한 압박이기도 했다. 더욱이 직장도 그만두고 큰 기회비용을 들여 택한 선택에 미련이 없어야 하지만, 어찌 사람 마음이 그럴 수 있겠는가. 가지 않은 길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길에 자꾸만 기웃거리며 몸과 마음을 헛되이 소비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처지의 스위스 학생 역시 성별과 국적이 달랐지만, 스스로의 결정에 대한 불안감을 타지에서 홀로 견뎌내야 하는 고충은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인터뷰라는 것도 잊고 한 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나누고 말았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 친구는 인터뷰 스크립트 작성할 때 고생을 많이 했겠다 싶다.
유학생 금지곡 -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조용필 12집, 1990)
개인적으로 가왕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는 유학생 금지곡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사를 살펴보면 첫마디부터 구구절절 와 닿지 않는 부분이 없다. 이 노래를 듣다 보면 나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되겠다고 이렇게 욕심을 부렸나 싶고, 야밤에 괜스레 소주가 마시고 싶어 지는 것이다. 비싸서 마실 수도 없는 소주를.
나는 떠날 때부터 다시 돌아올 걸 알았지 눈에 익은 이 자리 편히 쉴 수 있는 곳 많은 것을 찾아서 멀리만 떠났지 난 어디 서 있었는지 하늘 높이 날아서 별을 안고 싶어 소중한 건 모두 잊고 산건 아니었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그대 그늘에서 지친 마음 아물게 해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현재의 불안정함에서 오는 이런 유형의 문제는 해결하기 쉽지가 않다. 아마 이런 유형의 고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수험생, 취업준비생과 같은 지나간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저 사실을 인지하고 조금씩 견뎌 내다 보면 지나가는 열병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불안을 딛고 헤쳐나갔던 지난 경험들과 또다시 그 불안함을 자처한 자신을 충분히 아껴주자. 너는 참 용감하게도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왔구나.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빈 손으로 돌아가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으로 또 하루를 충실히 담아내는 것이었다. 실제로 시간이 지나 기말 과제로 정신없이 바빠져 우울해할 여유조차 없어지니 다행히 이 또한 지나쳐갔다.
이렇게나 길게 영국 유학 어떠냐라는 지인들의 질문에 답을 해본다. 짧은 메신저로는 담을 수 없는 조금 긴 대답. 힘들어할 수 없을 것만 같이 좋지만 힘들 때가 있고, 후회하다가도 후회하지 않게 되는 그런 복잡 미묘한 이야기.
-2019년 12월
연말에는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소소한 크리스마스 장식, 교육대학(School of Educ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