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영국 테이트 미술관 특별전 (서울시립 북서울 미술관)
질문으로 시작하는 글을 좋아한다. 문장에 마침표 대신 물음표가 달려있을 때 우리는 그 문장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본다'는 익숙한 표현이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에 우리가 무엇을 '본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한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상을 보내는 동안에는 이런 질문들에 고민할 일이 많지 않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가득하고, 질문의 답을 생각하는 일에 온 힘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바로 미술관이다. 내게 미술관이 주는 즐거움은 당연한 것이 당연해야 굴러가는 일상에서 떨어져나와 모든 것을 낯설게 만드는 즐거움이다.
이번에 다녀온 전시는 북서울 미술관에서 하는 <영국 테이트 미술관 특별전>이었다. 큰 주제는 '빛'이고, 각기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빛을 주제로 한 16가지 테마로 구분해 구성했다. 이 전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제임스 터렐 때문이었다. 일 년 전 즈음에 <미지의 문>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을 읽을 때 인상 깊은 구절은 노트에 적어두는 습관이 있는데, <미지의 문>을 읽으며 한 메모에는 제임스 터렐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위의 사진은 제임스 터렐의 <간츠펠트>라는 전시이다. 전시의 이름은 간츠펠트 효과에서 따온 것이다. 간츠펠트 효과란 우리가 실제로 보고 있지 않은 것을 뇌가 만들어 내 보게 한다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전시 공간에서 빛의 색은 계속 바뀐다. 색이 바뀔 때 우리가 보고 있는 색은 더 이상 존재하는 색이 아니다. 방안이 푸른빛으로 가득함에도 우리는 여전히 노란색을 보고 있고, 우리가 푸른빛을 볼 때에는 더 이상 푸른빛은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p.183 <간츠펠트> 전시에서 눈을 통한 감각 정보와 뇌에 대한 인식 체계는 마치 파도 앞 모래성처럼 덧없이 허물어진다.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판단하는데 자신이 없어진다. 터렐은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를 철저하게 질문한다. 모든 순간은 진실이 아니지만 인간의 한계를 진실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면 진실이 아닌 순간도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진실이기도 하다. 이 간단한 두 문장은 지독하게 모순적이어서 난감하고 그래서 재미있기도 하다. 언젠가 이 주제에 대해 제대로 글을 써보고 싶다. 일단 지금은 다시 전시회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한다.
제임스 터렐에 눈길이 가서 찾아봤는데 모네 그림도 있다고 하더라. 세상에 모네 그림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튼 나는 좋아한다. 그래서 당장 북서울 미술관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전시장 내부는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다. 사진 대신 인상 깊은 작품들을 볼 때마다 간단한 메모를 해두고 전시장을 나와서 하나의 글로 묶어보기로 했다. 메모를 하면서 큰 줄기가 된 하나의 질문이 있다. 우리에게 빛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것이다.
빛을 보고 그리고 생각할 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시작은 '빛, 신의 창조물'이다. '빛'하면 사람들은 무엇이 생각날까? 그 대답은 무수히 많겠지만, 그중에는 빛과 어둠의 관계에 대한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빛과 어둠은 가장 대표적인 양면성의 관계이다. 우리를 둘러싼 양면적인 관계들은 빛과 어둠의 비유로 설명되고는 한다. 선과 악, 삶과 죽음, 기쁨과 절망... 수없이 많다. 종교에서 빛은 선과 순수, 내지는 신 자체이다. 여기서 우리가 빛을 무엇으로 보는지 하나의 대답을 찾았다. 빛은 우리가 이를 수 없는 대상이고, 그렇기 때문에 닿기를 원하는 대상이다. 종교화에서 빛이 묘사되는 방식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있다.
"어둠 속에 깜박이는 불빛은 고통 속의 희망을 나타냈다."
여기서 빛의 중요한 성질이 나타나는데, 빛은 '깜박인다.' 우리는 빛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언제든 어둠이 짙게 드리워지면 희미해질 수 있고 끝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빛에 속해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온전히 빛뿐인 세계에 있다면, 빛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어둠 속에 있음을 알고 있는 개인은, 스스로가 빛에 속할 수 없음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빛이 사그라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종교적인 차원에서 신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믿음이 있는 한, 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이 더 이상 우리를 구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에 빠질 수 있다.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신과 신도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식은 부모와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를 원하더라도, 부모의 사랑이 자신에게 더 이상 이르지 않게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사랑의 단절은 곧 절망이다. 그러니 정리하자면, 빛은 우리가 절대적이며 영원불멸하게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무엇이며 동시에 언제든 우리 앞에서 사라질 수도 있음을 의심하는 무엇이다.
'빛, 연구의 대상'부터 '부르스 나우먼, 빛을 가두다'까지 이르렀을 때 하나의 일관적인 인상이 남았다. 이들 작가들이 빛을 몹시도 가두어두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열망은 보편적인 열망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진을 찍는 이유도, 내가 메모를 남기는 이유도 모두 이 열망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 일시적이며,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똑같은 풍경을 다시 보게 되더라도 그 풍경은 이전과 같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모네는 빛의 변화에 따라 똑같은 풍경을 몇 번이나 다시 그렸을 것이다. 빛은, 정확히 말하자면 빛이 보여주는 풍경은, 계속해서 변한다. 무엇도 그러한 변화를 멈출 수 없다. 빛이 순식간에 떠나버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빛에 매혹되고 탐구하려 하고 궁극적으로 가두어두려 하게 되는 것이다. 뛰어난 화가들은 빛을 가두는 일에 성공했다. 우리는 모네의 그림을 보면서 그가 가둔 빛을 함께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그가 본 빛이 캔버스 바깥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오직 사각의 공간 안에서만 재현된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동시에 그 사실이 황홀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특정한 순간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빛 때문이라고 할 때, 화가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를 극복해냈다. 이제 순간은 캔버스 안에서 영원하다. 이 사실이 의심할 여지없이 자명해진다면, 인간은 이제 무엇이라도 두려울 것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빛을 집요하게 탐구할수록 빛을 더 정확히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기술의 발달까지 도와주니 이제 작가들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빛을 가둘 수 있다. 조명을 잘 활용하다면 빛이 보여주는 풍경을 똑같이 재현할 수도 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순간의 빛을 구현한 필립 파레노의 <저녁 6시> 처럼 말이다. 우리는 빛이 보여주던 일시적인 순간을 아주 긴 영원처럼 늘릴 수 있고, 멈춰둔 채로 계속 볼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닿을 수 없던 것에 어느 정도 닿을 수 있게 되었다. 저 하늘 위의 신이 아니고서야 해낼 수 없던 일들을 지상의 인간들이 해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금 질문이다. 이 질문은 무언가를 집요하게 탐구해낸 이들이면 어느 순간 맞닥뜨리게 되는 질문이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내가 보고 있던 작품은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품이었다.
아쉽지만 이 작품의 사진은 찾지 못했다. 기억나는 대로 묘사를 해보자면 일단 원형의 아크릴 판이 매달려있다. 한쪽에서 빛을 비추면 반대쪽 벽면에는 노란원이 나타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이 있다. 같은 아크릴 판에서 만들어진 보라색의 원은 크게 주변을 돌고 있다. 한 개의 원형 판에서 두 가지 색을 가진 두 원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원은 가만히 머물러있고 다른 한 원은 계속해서 돌고 있게 된다. 이 작품에서 빛은 멈춰있으면서도 움직이고 있고, 서로 반대되는 두 색이 동시에 나타나며, 한순간에 두 원이 겹쳐지기도 하는 그런 빛이다. 작품 설명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색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바라보여질 때만 존재한다. 색의 분석이란 실로 우리 자신을 분석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색' 대신 '빛'을 넣어보면 답에 가까워진다. 빛을 볼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신을 좇던 이는 그 끝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친다. 우주를 탐구하던 인간은 우리의 뇌 속에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던 아이들처럼 세계 앞에, 빛 앞에 앉아있었고 등장한 배우는 또다시 나 자신이었다. 이 기분을 설명하기 위해 페르난두 페소아의 글을 빌려온다.
<불안의 책> p.96
도시 속 공원이라는 유용하고 질서 정연한 공간은 내게 그저 새장 같은 곳이다. 그 안에서 갖가지 색깔을 자발적으로 피워낸 나무들과 꽃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은 고작, 가질 수 없고 떠날 수 없는 공간, 그리고 본래 생명이 결여된 아름다움뿐이다.
그러나 이 풍경이 내 것처럼 느껴져 희비극 속 등장인물처럼 풍경 속으로 들어서는 날이 있다. 착각에 빠진 날이긴 해도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한결 행복하다. 정신이 산만할 때면 내게 정말 돌아갈 집과 가정이 있다고 상상하기 시작한다. 나 자신을 잊을 때면 삶의 목표가 있는 보통의 사람이 되어 다른 옷을 꺼내 털고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하지만 환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데 원래 환상은 오래가지 않기 때문이고 곧 밤이 오기 때문이다. 꽃들의 색깔과 나무 그늘, 정비된 도로와 화단, 이 모두가 희미해지고 작게 줄어든다. 잠시 자신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착각했던 내 머리 위로 별들이 수놓은 거대한 하늘이 갑자기 열린다. 이제 나는 형체 없는 관객은 잊어버리고 서커스에 온 어린아이처럼 들뜬 마음으로 첫 번째 등장할 배우들을 기다린다.
나는 자유롭고 길을 잃었다.
느낀다. 열기로 몸을 떤다. 나는 나다.
매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가 빛을 가둘 수도, 완벽히 재현할 수도 없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보았던 빛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실체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이 관점을 세계로 확장해본다면, 우리의 세계는 하나의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경험하는 개인으로 인해 존재한다. 세계가 한 명의 개인이라면, 무수히 많은 세계들이 공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한 개의 원이 서로 상반된 두 색과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두 원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듯이 말이다. 숨 쉬는 모든 존재들이 각자의 몫인 세계를 소유한다. 빛이 곧 우리 자신, 한 명의 개인이라면, 빛이 가진 성질은 우리가 가진 성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빛이 보여주는 유한함은 개인의 유한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빛에 대한 탐구가 시간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멈춤을 향해가지만 우리는 멈춤을 경험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것이다.
칸딘스키는 빛을 동적인 표현으로 담아낸다. 찰나의 순간이 아닌 연속된 흐름 속에서 경험되는 음악처럼, 그가 캔버스에 담는 것은 지속되는 흐름이다. 칸딘스키의 표현 방식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멈춰있지 않다는 당연한 사실, 빛과 세계 그리고 그들을 목격하는 우리 자신이 거침없이 끝을 향해간다는 깨달음을 명백하게 한다. 빛은 죽음을 향해가는 한 명의 목격자와 함께 흘러간다. 목격된 아름다움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며, 한 사람에게만 경험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빛을 정확히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자 하는 행위는 무용해진다. 빛이 펼친 아름다움은 한 사람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져다주고,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을 경험하게 한 것으로 역할을 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빛을 담고자 노력한 그림을 보는 제삼자의 관객, 목격자의 목격자가 볼 수 있는 것은 한 개인의 세계일 뿐이다. 우리는 빛의 순간이라기보다 삶의 순간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세계, 무수히 많은 삶, 그 앞에서 다시금 나 자신으로 돌아간다. 바깥의 삶과 죽음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안 쪽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제임스 터렐은 전시장을 떠나기 직전에 만날 수 있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관객은 빛을 '경험'한다. 그러나 앞서 일련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이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빛'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제임스 터렐에게 대답할 차례이다.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각자의 대답을 할 것이다. 각자의 세계에서 각각이 유일한 답인 대답을 하게 될 것이다. 제임스 터렐 또한 자신의 세계에서 내린 답을 제시한다.
"물체, 이미지, 초점이 부재할 때, 당신은 무엇을 바라봅니까? 당신은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다시금 <간츠펠트>에 대한 설명을 떠올려본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진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기에 개인은 무한한 존재가 된다. 이 세계의 풍경은 오로지 한 명의 개인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만 세계를 볼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은 세계의 전부일 수밖에 없다.
글을 마치며 전시를 보기 전이든 후든,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을 소개하고 싶다.
김종진 <미지의 문 : 공간과 예술, 그 너머의 생각> 효형출판 (2018)
테드 창 <숨> (김상훈 역) , 엘리 (2019)
테드 창의 <숨>은 매력적인 단편들로 가득한 sf 소설집인데 취향에 맞다면 단숨에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 읽기 부담스럽다면 그중에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단편만은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전시 작품 중에 스티븐 윌라츠의 <자동 시각장 제1번>을 보자마자 이 작품이 떠올랐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다면 이 단편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마무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에서 내가 사랑하는 구절로 하는 것이 좋겠다.
p.94 나의 메시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이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이며 이 거짓말이야말로 깨어있는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문명의 존속은 이제 자기기만에 달려있다. 어쩌면 줄곧 그래 왔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