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 다시 보기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을 처음 봤을 때는 감상적인 영화라고 생각했다. 슬픈 사연의 인물들이 무고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며, 주인공은 직접적으로 ‘과연 이들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라고 관객에게 호소한다. 이토록 불행한 사람들, 이토록 슬픈 이야기를 보라면서 감성적인 음악을 틀어준다. 사건의 비밀이 밝혀진 이후로 줄곧 작위적이고 감정의 과잉이라고 느꼈다. 관객에게 저들의 행동이 옳았나 고민할 여지도주지 않고 어서 슬퍼하고 용서하라고 부추기는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보게 된 <오리엔트 특급살인>은 처음과는 조금 다른 인상이다. 같은 영화에서 다른 감상을 느낀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지만, 그래서 영화를 보는 일은 즐겁다.
살인사건이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동기는 대체로 복수심이다. 복수심은 충분히 단죄되지 못한 죄로부터 비롯되며, 복수심을 가진 인물은 악인을 자기 힘으로 단죄하고자 한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또 다른 작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단적으로 단죄에 대한 이야기이다. 죗값을 치르지 않은 악인들은 지독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처벌받는다. 추리 소설에서 결국 누군가 죽어야만 한다면, 죽는 인물이 악인이고 죽음의 이유가 단죄일 때 가장 깔끔하다. 작가는 죽여 마땅한 인물을 죽였고 독자들은 이야기를 죄책감 없이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보며 독자는 과연 미궁 속에 숨겨진 비밀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한다. 인물들은 장기말과 같이 움직이며 독자에게 조각난 퍼즐 중 하나처럼 기능한다. 퍼즐이 다 맞추어진 순간의 쾌감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할 이유이다.
그러나 <오리엔트 특급살인>을 같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퍼즐이 모두 맞추어졌을 때 얻는 것은 쾌감이 아니라 ‘균열난 영혼’들을 목격하는 것이다. 포와로의 대사처럼 한 명의 악행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인생을 무너뜨렸는지를 목격한다. 영혼의 균열은 봉합되지 못한 채로 삶은 계속 이어졌다. 봉합되지 못한 상처는 인물들을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인물들은 삶을 살아가고는 있으나, 정신적인 시간은 과거에서 나아가지 못한다. 과거의 상처에 덜미를 붙잡여 끌려온다.
포와로는 사건의 진실을 목격한 뒤에 '정의'에 대해 고민한다. 죄를 저지른 이들을 처벌해야 마땅하나,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 것은 이 사회가 아닌가? 죄를 제대로 단죄하지 못한 사회가 그들을 살인자로 만든 것 아닌가. 그렇다면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 사적 처벌로서의 살인을 과연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저들이 옳은가, 틀렸나.’를 판단하려 한다면 영화는 감상적으로 느껴진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옳고 그름의 판단이라는, 이성적 판단을 요구하는 반면에 영화 전반에 흐르는 기류는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영화 전반이 인물들의 비극적인 상황에 감응하도록 짜여있으나 결말부에서는 이성적인 판단의 문제를 제기하니, 철로가 어긋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된다. 양방향으로 갈라져야 마땅한 선로가 이미 억지로 한쪽으로 고정되어있는 듯이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단죄가 아닌 치유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떨까? 균열난 영혼들이 겪는 고통은 다채롭다. 슬퍼하고 원망하며 증오한다. 하지만 균열난 영혼을 고통받게 하는 감정의 근원에는 공통적으로 ‘무력감’이 있다. 비극 속 인물들이 운명 앞에서 겪는 무력감과 같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납득불가능한 사건들이 예측불가능하게 벌어진다. 무고한 사람이 죽고, 죄를 저지른 사람은 죗값을 치르지 않으며, 누군가의 불행과 죽음에 개의치 않는 채로 세계가 여전히 작동한다. 이 거대하고도 통제불가능한 비합리,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 속에서 상처받은 개인은 벗어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낀다.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거나,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지 못했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에서 구하지 못해서 무력하다.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한 이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전쟁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이성적인 노력이 아니다. 균열난 영혼은 무너진 젠가와도 같다. 해결해야 할 것은 나무토막을 처음부터 다시 쌓는 일이다. 그리고 나무토막을 다시 쌓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무토막 하나를 들어 올릴 수 있고, 쌓아 올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레체트를 죽이기 위해 반드시 모든 인물들이 한 번씩 칼로 찌를 필요는 없었다. 처벌받지 않은 죄에 대한 단죄였다면, 누구 한 사람을 대표로 세워 그가 살인을 저지르게 해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바드 부인이 다른 인물들을 불러 모은 이유는 살인이 단죄가 아닌 치유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칼을 찔러 넣는 행위는 무너진 젠가의 나무토막을 올림과 같다. 인물들은 자신의 균열난 영혼을 회복하기 위해서, 무력감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제 손으로 제 힘으로 칼을 찔러 넣어야 했다.
They have a chance now. They can go, live, find some joy somewhere. Let it end with me.
‘이 사람들을 살아가야 해요.’라고 말하는 허바드 부인의 대사는 ‘이들에게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들이 있는 공간이 다른 어느 곳도 아닌 기차라는 점 또한 의미가 있다. 기차는 한번 올라타고 나면 함부로 멈출 수 없이 나아간다. 살인과 함께 일어난 눈사태는 기차를 잠시 멈추게 했지만, 그럼에도 기차는 계속 나아가며 각 인물들을 종착지로 향하게 한다. ‘기차를 타는 것’과 ‘칼로 찌르는 행위’ 모두 인물들이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제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질문은 ‘과연 그들이 옳았는가?’가 아니다. ‘균열난 영혼은 회복될 수 있을까?’이다. 레체트를 죽임으로써 인물들은 암스트롱 사건의 가해자를 처벌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인생을 허물었던 한 존재를 처벌했다. 악인에 대한 처벌에서 나아가서 죄의 값을 치르게 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살해이고, 이유 없는 불행을 계속해서 파생시키는 세계에 대한 살해이며, 비합리적이고도 억압적인 삶의 숙명성에 대한 상징적인 살해이다. 삶의 비극에서 벗어날 수 없을 인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만은 있다고 증명하는 과정이다.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이 맹인이 되고도 '내 두 손이' 눈을 멀게 했다고 말하는 오이디푸스처럼.
인물들은 표면적으로는 죄인을 단죄했고 내면적으로는 무력감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과연 영혼의 균열은 봉합되었을까?
기차에서 내린 사람은 포와로 한 사람뿐이다. 탐정은 살인의 주동자들에게 죄를 묻지 않기를 택했다. 기차는 계속해서 나아가며, 기차에서 내리지 않은 이들은 창 너머로 포와로를 바라본다. 그들에게서 해방감이나 만족감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의 표정에서 복수의 허무함을 볼 수도 있겠지만, 만일 이들이 겪는 것이 허무라면 복수라는 행위 자체의 허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허무는 삶이 가진 속성이다. 인간 존재가 죽음이라는 사건 하나로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숙명적인 허무이다. 그럼에도 삶은 이어진다는 사실에서 오는 허무이기도 하다. 암스트롱 사건의 무고한 죽음 이후에도 주변 인물들의 삶은 상처를 간직한 채 이어졌고, 레체트라는 중대한 악을 해소하고 나서도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다를 것 있는 것은 오직 인물들 각각이 회복한 효능감, 이제 막 하나를 올린 내면의 나무토막이다. 인물들은 영혼의 균열을 봉합했다는 판단하에 나아가야만 한다. 이제 증오와 원망의 대상으로 삼을 사람은 죽었고, 그럼에도 상처가 회복되지 못했다면 죽은 이를 다시 죽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비장하게까지 느껴지는 모습으로, 영혼의 균열이 봉합되었다고 믿어야 하는 책무를 가지고서 나아간다.
균열난 영혼은 회복될 수 있을까. 허바드 부인의 바람대로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 제의가 제 역할을 해내어 인물들의 상처를 회복해 주었을까. 그 질문에 누구도 확신으로 답할 수 없다. 암스트롱 사건이 예측불가능하게 벌어진 불행이듯이, 삶 자체가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봉합된 줄 알았던 상처가 끝끝내 뒤쫓아오는 과거의 유령처럼 되살아나 다시금 인물들을 고통받게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야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영혼의 회복을 믿을 수밖에 없다. 불확실성에서 가능성을 찾고 가능성을 믿는 것이, 타고나기를 삶 앞에서 무력한 존재가 삶을 견디는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