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이타닉> 잭과 에우리디케 신화의 연관에 대해
<타이타닉> 재개봉을 보고 나서 잭은 어느 시절에 보아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는 나이들지언정 잭은 스크린 속 영원한 청춘으로 남았다. 시간이 흘러 <타이타닉>을 다시 보게 되는 관객들이 대면한, 아이맥스와 3D라는 신기술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잭은 어쩌면 노인이 된 로즈가 다시 마주한 과거와 맥을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재개봉을 보러 온 관객들 모두가 잭을 다시 만난 로즈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재개봉을 한지 시간이 좀 흘렀지만, 늦게나마 당시에 썼던 리뷰를 올려본다. <타이타닉>을 다시 보며 떠오른 한 가지 이미지는 '에우리디케 신화'였다.
잭은 로즈를 보트에 태울 때 이미 죽음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보트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던 로즈는 다시 잭에게로 돌아온다. 삶을 포기하더라도 사랑을 택하는 로즈의 결정은 극적이고 아름다운 재회를 연출하면서도, 에우리디케 신화를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 로즈는 죽은 에우리디케를 찾아 죽음의 공간으로 찾아오는 오르페우스이다. 죽음이 결정된 잭은 이미 죽은 에우리디케이며, 타이타닉은 죽음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신화 속 지하세계이다. 이곳은 고립되어 있으며 외부에서 함부로 들어올 수도,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공간이다. 여기에 삶의 공간인 육지(혹은 미국)로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바다’라는 물의 공간은 신화 속에서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강’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는 이승으로 향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돌아보지 말 것’이라는 금기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이승을 눈앞에 두고 뒤를 돌아보고 만다. 에우리디케는 결국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장면은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두 여성은 결국 헤어짐의 결말에 이르고, 떠나기 전 뒤를 돌아보며 마주한 것은 상복 같은 드레스를 입은 사랑하는 이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오르페우스는 왜 뒤를 돌아보았을까?
오르페우스-에우리디케 신화의 흥미로운 해석 중 하나는,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본 이유가 에우리디케가 그러길 바라여서였다는 해석이다.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가 자신을 보길 바라여 남편을 불렀고, 그로 인해 영원한 이별을 맞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에우리디케는 왜 이별을 바라였을까?
‘이별’은 삶에서 거치는 통과의례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가장 먼저 어머니와 자신의 육체 사이에서 이별을 경험한다. 원래 하나였던 것이 둘로 나누어지는 이별이다. 이 아이는 부모의 품에서 성장하여 어느 순간 독립된 존재로서 다시금 이별을 경험할 것이다.
단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뿐 아니라 ‘시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삶의 과정 자체가 이별의 연속이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풍경은 어른이 된 아이 앞에 재현될 수 없다. 과거의 풍경은 과거에만 머물러있으며 재현이 불가능한 단절된 무언가이다. 우리는 과거가 투영된 것들, 사진이나 아끼는 물건들을 다시 꺼내보며 기억을 회상할 수는 있으나 같은 경험을 반복할 수는 없다. (마치 매 순간 빛이 보이는 풍경이 달라 우리는 결코 같은 풍경을 다시 볼 수 없듯이.) 즉,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선에서 과거라는 인식 자체가 현재와 단절된 이별을 전제한다.
그런 점에서 에우리디케는 죽음이면서도 과거를 상징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오르페우스가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는 과거에 속해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르페우스의 현재와 공존할 수 없다. 오르페우스가 과거에 머무는 방식으로만 재회가 가능할 뿐이다. 오르페우스가 과거로 돌아와 에우리디케를 만날 수는 있으나, 또한 오르페우스가 삶을 포기하고 에우리디케와 함께 죽음을 결정할 수는 있으나, 단지 그뿐이다.
이는 타이타닉에서 배를 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어린아이와 여성이거나 상류층 이어야 하기에 로즈는 배를 탈 수 있지만, 잭을 위한 배는 없는 것과 유사하다.
로즈는 계속해서 잭에게로 돌아가고 잭을 향해가는 인물이며, 타이타닉에서 로즈가 뛰어가 잭을 만나는 장면은 여러 차례 등장한다. 반면에 잭이 로즈의 손을 잡기 위해서 로즈가 ‘손을 내밀어주어야’한다는 점도 흥미로운 점이다.
잭은 타이타닉에서 뛰어내리려던 로즈에게 ‘내게 손을 내밀어요. 그럼 난 손을 놓지 않을게요.’라고 말한다. 타이타닉의 침몰 상황에서도 같은 대사가 반복되며 잭은 그 말대로 로즈의 손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로즈가 잭의 손을 놓는 순간은 잭의 바람대로 포기하지 않고 살기를 결심하는 순간이다.
로즈가 손을 놓으며 잭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다. 마치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며 저승으로 돌아가게 되는 에우리디케처럼 말이다.
로즈는 잭의 바람대로 살기를 결심했다. 잭은 의식을 잃어가는 로즈에게 ‘당신이 죽는 순간은 지금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를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가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오르페우스가 해야 하는 일은 어쩌면 정해진 운명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직면하고 또한 거스를 수 없는 죽음을, 사랑하는 이와의 작별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르페우스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와의 이별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를 과거로 돌아오게 하고 죽음으로 거슬러오게 하면서도, 동시에 미래로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인도자의 역할이라는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인도자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로 하여금 죽음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면서 동시에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는 잭이 로즈에게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뜻깊다. 잭이 살아온 자유분방한 삶은 로즈에게 동경의 대상이다. 로즈는 잭처럼 무엇에도 묶이지 않고 뜻대로 사는 삶, 억압에서 벗어나 남자들과 같이 말을 타고 싸구려 맥주를 먹는 삶을 꿈꾼다. 잭은 로즈가 미래를 꿈꿀 때, “당신은 떠날 수 있을 거예요. 같이 싸구려 맥주를 먹어요. 내가 같이 해줄게요.”라고 말하며 꿈이 단지 몽상이 아니라 실현가능한 미래이게끔 만드는 인물이다.
잭은 로즈의 인도자이면서도 보호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로즈를 삼등실에 데려가 겪어본 적 없는 즐거움을 경험해 보도록 하고 뱃머리에 서는 유명한 장면에서 “내가 날고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해방감을 경험하게 한다. 이때 잭은 로즈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면서 동시에 그의 뒤에 로즈를 잡아주는 보호자이기도 하다. 마치 자전거를 처음 타본 아이를 뒤에 잡아주는 부모와도 같다. 이렇게 본다면 로즈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두 발만으로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는, 잭과의 이별이 필연적이다. 아이는 부모와 이별해야만 하며 로즈는 제 힘으로 날아야 한다.
칼과 결혼하며 사그라질 뻔한, 잭이 ‘내가 사랑하는’이라고 표현한 로즈의 열정은 결국 살아난다. 통과의례를 거치며 성장한 아이는 죽음과 대비되는 삶, 새로운 세계를 의미하는 육지이자 미국에 이르러서 잭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헛된 꿈에 그쳤을 삶을 실현시킨다.
많은 이들이 ‘잭이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상상하며 잭의 죽음을 아쉬워하면서도, 그러나 현재의 결말이 가장 완벽하다는 것에는 공감할 것이다. 잭이 죽음으로 완성되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는 이유는 잭이 가진 속성이 영원한 소년과 시들지 않는 청춘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잭은 오직 로즈의 기억으로만 머물기에 영원히 나이 들지 않는 소년이다. 또한 로즈의 기억에 남아 시들지 않을, 빛났던 청춘의 한순간 그 자체 이기도 하다.
(과거는 현재와 단절되어 있다는 점에서 현재에 의해 해쳐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현재에 대해서는 실망할 수 있지만, 과거에 대해서는 실망할 수 없다.)
사람들은 과거를 사랑한다. 과거는 현재보다 아름답고 낭만적이며,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과거, 청춘의 시절로 빚어낸 소년을 관객은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